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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고봉 기대승 도중만성 8수(高峯 奇大升 途中謾成 八首)

서예란 표현하고자 하는 글귀를 마음에 담아 적당한 농담의 먹물로 적신 붓을 잡고 손목으로 가해지는 조심스러운 힘에 의하여 붓끝이 화선지와 만나 시각적으로 표출되는 예술적 행위를 말한다.

흔히 사람을 판단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은 중국 당대(唐代) 관리를 선정할 때 4가지를 기준으로 삼았는데 이는 바른 몸가짐, 사리에 맞는 언변, 잘 쓴 글씨, 사물의 판단능력을 인선(人選)의 조건으로 삼았다.

그 중 글씨를 바르게 잘 쓰는 것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다소 모호한 면도 있지만 타고난 선천적 조건도 무시할 수 없다.” 젊은 학자는 있어도 젊은 서예가는 없다”는 말은 사람의 글은 늙어서 갖추어진다는 인서구노(人書具老)는 합당하여 과거를 염두에 둔 젊은 학자들은 글씨를 잘 쓰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는 뜻의 심정즉필정(心正卽筆正)은 당(唐) 나라 유공권(柳公權)에게서 비롯된 서예 용어이다. 유공권은 당나라 경조(京兆) 화원(華原) 사람으로 헌종(憲宗) 때 진사가 되었고, 서예에 뛰어났다. 처음에 왕희지(王羲之)를 공부하고, 이어 구양순(歐陽詢)과 우세남(虞世南)을 공부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중년 이후에는 안진경(顔眞卿)의 서풍(書風)을 닮아갔는데, 후세 사람들이 중당(中唐)의 서예를 논할 때 안진경과 유공권을 묶어 ‘안근유골(顔筋柳骨)’ 즉, 안진경의 힘줄과 유공권의 골기라 부르며 칭송하였다.

어떻게 하면 글씨를 잘 쓸 수 있냐는 목종(穆宗)의 질문에 “붓을 사용하는 것은 마음에 달려있으니,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게 됩니다(用筆在心 心正則筆正)”라고 대답한 고사는 후대에도 서예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었다. 이는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다(書與其人)’는 전통적인 서예관에 입각한 용어이다.

 

어젯밤 장마가 시작되어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 들으며 갑자기 글 쓰고 싶은 욕망이 생겨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사림 정신이 투철한 경세사(經世)이며 퇴계와 학문적 논쟁으로 유명한 고봉(高峯) 선생이 남긴 도중만성(途中謾成) 8수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도중만성(途中謾成 : 도중에 부질없이 읊다). 八首

 

其一.

愁外水流花謝(수외수류화사) 시름 밖에 물이 흐르며 꽃들은 시들고

意中雲白山靑(의중운백산청) 마음속에는 흰 구름에 산은 푸르구나.

蹇驢破帽西去(건려파모서거) 굼뜬 나귀, 바렌 두건 쓰고 서쪽으로 가니

無限長亭短亭(무한장정단정) 십리 정자에 5리의 정자라 한이 없구나.

 

其二.

明月樓頭夢斷(명월루두몽단) 밝은 달빛 누각 머리엔 꿈도 끊어졌지만

美人應在天涯(미인응재천애) 아름다운 사람 응당 하늘가에 있으리라.

起來裁書滿紙(기래재서만지) 일어나 와서 길게 적은 편지를 썼지만

碧山萬疊雲遮(벽산만첩운차) 만 겹의 푸른 산을 구름이 가로막았네.

 

其三.

野外人家八九(야외인가팔구) 마을 밖의 사람들 집 여덟 아홉 되는데

夕陽遠樹依微(석양원수의미) 석양 질 무렵 먼데 나무는 어렴풋하구나.

忽聞竹籬犬吠(홀문죽리견폐) 문득 들리는 대 울타리에 개 짖는 소리

應有幽人獨歸(응유유인독귀) 은거하며 사는 사람 있어 홀로 돌아가네.

 

其四.

堤下荷花亂發(제하하화난발) 제방 아래 연 꽃은 흐드러지게 피었고

堤上楡柳交陰(제상유류교음) 제방 위엔 느릅과 버들 함께 그늘지네.

一雙白鷺竝坐(일쌍백로병좌) 한 쌍의 하얀 백로가 나란히 앉았으니

爲問渠有何心(위문량유하심) 묻게 되노라 개천에서 어떠한 마음인지.

 

其五.

籬前秧稻萋萋(이전앙도처처) 울타리 앞엔 볏 모가 아름답게 우거지고

竹外鷄聲裊裊(죽외계성뇨뇨) 대나무 너머 닭 소리 가늘게 간드러지네.

老翁岸幘輕衫(노옹안책경삼) 늙은 노인은 가벼운 적삼에 두건 대충 쓰고

起向花陰閑繞(기향화음한요) 일어나 한가히 두른 꽃그늘에 나아가네.

 

其六.

老樹疎蟬咽咽(노수소선열열) 늙은 나무엔 드문 매미가 슬퍼 목이 메고

松根流水涓涓(송근류수연연) 송근 사이로 흐르는 물 연연하구나.

有人獨立階上(유인독립계상) 어떤 사람이 섬돌에 올라가 외로이 서서

倚杖閑望雲邊(의장한망운변) 지팡이 짚고 한가로이 구름 가 바라보네.

 

其七.

淸江抱村西去(청강포총서거) 맑은 강이 마을을 품고 서쪽으로 가는데

夾岸亂山四圍(협안난산사위) 언덕을 낀 어지러운 산이 사방을 에웠네

我今匹馬東渡(아금필마동도) 나는 이제 필마로 동쪽으로 건너가는데

不知歸路是非(부지귀로시비) 돌아가는 길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네.

 

其八.

疊疊雲峯乍起(첩첩운봉사기) 겹겹으로 구름 낀 봉우리 마침 우뚝 솟고

靑靑野色愈鮮(청청야색유선) 푸르디푸른 들판 빛 뛰어나게 선명하네.

牧童牛背橫笛(목동우배횡적) 소치는 아이는 소 등에서 피리 가로 불며

落日路繞溪邊(낙일로요계변) 떨어지는 해에 시냇물이 에두른 길을 가네.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 ~ 1572) 조선 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사간,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로 전라남도 나주 출신.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이다. 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 등을 말함)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계부(季父)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조선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칠논변(四七論辨 : 사단과 칠정에 관한 논변)을 전개하였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 되었으나, 종형 기대항(奇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 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이조정랑(吏曹情郞)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 : 조선시대 명나라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던 관직)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그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서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 : 임금에게 經書를 강의한 관직)을 겸직했고, 1570년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과 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고부(古阜 : 전북 정읍의 옛 지명)에서 객사하였다. 종계변무(宗系辨誣 :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명나라에서 잘못 기록된 내용을 시정해 달라고 주청 했던 사건)의 주문을 지은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 되었고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고,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하여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는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 : 유교 명분에 입각해 어진 정치를 구현하는 일)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이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서는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왕에게 아뢰었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논사록·왕복서(往復書)·이기왕복서(理氣 往復書)·주자문록(朱子文錄)·고봉집(高峯集)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