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 ~ 1799)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부친은 현감을 지낸 채응일(蔡膺一), 조부는 좌윤을 지낸 채성윤(蔡成胤), 증조는 현감을 지낸 채시상(蔡時祥), 고조는 현감을 지낸 채진후(蔡振後)이다. 그는 영ㆍ정조 대에 활동한 남인(南人)의 지도자였다. 남인은 숙종 연간 권대운(權大運)이 재상을 지낸 이래 근 100여 년간 재상에 오른 인물이 없었는데, 채제공 대에 와서야 비로소 재상을 배출하였다.
채제공은 1720년(숙종46) 충청도 홍성(洪城)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홍성의 외가에서 자랐다. 병조 판서를 지낸 이지억(李之億)이 그의 외삼촌이다. 본인이 외삼촌댁에서 자랐으니만큼 그는 친누이 또는 사촌, 육촌 누이들에게서 얻은 조카들을 자식처럼 돌보고 가르쳤다. 번암집(樊巖集) 간행에 주도적 역할을 한 참판 유태좌(柳台佐), 홍문관 교리 윤영희(尹永僖), 참판 정홍경(鄭鴻慶) 등이 그의 종질 또는 재종질, 삼종질이다.
그는 18세 때인 1737년(영조13) 오필운(吳弼運)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24세 때인 1743년 문과에 급제했지만 청요직의 환로를 걷지는 못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바로 그해에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부임하는 부친의 임소에 따라가기도 하였다. 이후 오필운의 형인 오광운(吳光運)의 후계자로 관직을 시작하면서 오광운을 매개로 소론(少論)의 이종성(李宗城)과도 면식을 익혔다.
그의 환력(宦歷)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1755년 을해옥사(乙亥獄事)였다. 이때 그는 문사랑(問事郞)으로서 옥사의 실무를 처리하면서 영조의 정통성을 지지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영조의 신임을 받았고, 이후 승지로서 영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그리고 1758년 도승지로 있으면서 영조가 폐세자 비망기를 내렸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이를 환납한 일이 있다. 이 일은 사도세자를 보호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고, 그가 정조 연간 사도세자 숭봉 사업을 주도하는 데 정당성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1762년 모친상을 당하고 3년 뒤 부친상을 당하였기에 1760년대의 정국에서는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탈상한 뒤인 1770년대에야 병조 판서, 예조 판서, 호조 판서, 평안도 관찰사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채제공은 정조 즉위 후 예조 판서와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777년(정조1) 4월에는 규장각 제학을 겸하기도 하였다. 1778년에는 사은겸 진주 정사(謝恩兼陳奏正使)로 중국에 다녀왔고, 돌아와서 호조 판서와 규장각 제학 등을 지냈다.
1789년(정조13) 총리사로서 수원 현륭원(顯隆園) 공사를 감독하였고, 1790년에는 좌의정 겸 경모궁도제조(左議政兼景慕宮都提調)가 되었다. 1793년 1월에는 수원 유수가 되었고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하였다. 좌의정이던 그를 화성 유수로 보냈다는 것은 정조가 화성을 중요시했음을 보인 것이다. 같은 해 5월에는 드디어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이후 재상으로서 정조를 보필하다가 1798년 노병으로 사직을 청하였고, 1799년 돌림병이 돌 때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조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그의 병을 걱정하였고, 약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편지로 의견을 말하였다.
정조는 채제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契合)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稟賦)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 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 기상을 시(詩)로 표현할 경우 시가 비장하고 강개하여, 사람들이 연조 비가(燕趙悲歌 : 연,조나라 선비들이 우국충정으로 부른 슬픈노래 즉 우국충정의 뜻이 있음)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중략) ‘저렇듯 신임을 독점했다.’라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옛날에도 들어 보기 어려운 경우이다.
1799년 1월 18일에 사망, 3월 26일에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그는 영조연간 청남(南人淸流)의 지도자인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蔡彭胤)과 이덕주(李德胄)에게서 시를 배웠다.
친우로는 정범조(丁範祖)·이헌경(李獻慶)·신광수(申光洙)·정재원(丁載遠)·안정복(安鼎福) 등이 있고, 최헌중(崔獻中)·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이 그의 정치적 계자(繼子)가 된다.
순조 때 유태좌(柳台佐)가 청양(靑陽)에 그의 영각(影閣)을 세웠고,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洪可臣), 허목(許穆), 체제공을 모시는 도강영당(道江影堂)이 세워졌다.
저서로 번암집(樊巖集) 59권이 전한다.
소개하고자 하는 글귀는 번암이 소싯적에 비범함이 느껴지는 내용으로 채제공의 아버지는 말단 군수였으나 그 아들을 재상가 자제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하였다. 채제공의 글재주가 뛰어나니 여러 재상가 자제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게 되었다. 채번암이 정(精) 자를 운으로 하여 시 한 수를 지으니, “추풍고백응생자(秋風古栢鷹生子)요, 설월공산호양정(雪月空山虎養精)이라” 하였다. 한 재상가의 자제가 이 시구를 기억했다가 그 부친에게 들려주며, 채제공의 재주가 뛰어남에 재상가의 자제들이 채제공을 시기한다고 말하였다. 그 재상이 말하기를 “매는 가을에 새끼를 치면 겨울을 못 넘기고, 눈 덮인 공활한 산에 호랑이가 정기를 기른다.” 너희들을 가리켜 가을에 친 매의 새끼라 한 것이요, 호랑이는 자기 스스로를 말한 것이니, 다시는 채제공을 업신여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내가 젊은 시절 접한 내용으로 설한공산호양정(雪寒空山虎養精)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 살펴보니 설월공산(雪月空山...)로 표시되어 있다. 눈내리고, 춥고 공활한 산에서 호랑이가 정기를 기르듯이 편안하고 만족한 상황이 아닌, 힘들고 어려운 여건속에서 내공을 쌓아가며 미래의 꿈과 희망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하고자 하는 교훈적 의미가 담겨져 있어 번암선생의 시 몇 수를 호랑이 그림과 함께 自書해 보았다.
설월공산(雪月空山)
秋風枯栢鷹生子(추풍고백응생자) 가을바람 부는 마른나무 가지에 매가 새끼를 치고
雪月空山虎養精(설월공산호양정) 눈 내린 달밤 공활(空豁)한 산속에 호랑이가 정기를 기른다
청송장(靑松障 : 청송병풍)
翠黛連窓窈作林(취대연창요작림) 짙푸름이 창 앞까지 이어져 그윽한 솔숲을 이루었네
小風吹雨一庭陰(소풍취우일정음) 산들바람 비를 불러 시원하게 뜰을 적시고.
縱成屈曲當前障(종성굴곡당전장) 문 앞에 소나무 가지 구불구불 울타리로 굽히고 있어도
不忘升騰向上心(불망승등향상심) 솟구쳐 하늘로 오르려는 희망 잊은 적 없네
闤闠敎遮煙色遠(환궤교차연색원) 도심 쪽을 가로막아 뽀얀 연기를 멀리 몰아내지만
枝柯偸豁月光侵(지가투활월광침) 가지 사이는 툭 트여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네
幽禽認是屛間畵(유금인시병간화) 호젓한 새는 병풍속 그림으로 알련마는
怪底時時送好音(괴저시시송호음) 이상도 해라. 고운 노래 때때로 들려주네
약산 댁에서 국포 강박 어르신이 ‘청송 병풍’으로 제목을 정하고 운자를 불러 주시기에 그 자리에서 지어 올리다.(藥山宅 菊圃令丈 姜公樸 以靑松障命題呼韻 卽席草呈) 번암집 권3
청송장 시는 채제공이 혼례 다음 날 오광운(吳光運)의 집에서 열린 시회(詩會)에 참석하여 강박(姜樸)의 인정을 받았던 시로 강박(姜樸)이 평하기를 “구불구불 서린 소나무가 앞을 막고 있지만, 솟구쳐 위로 향할 마음을 잊지 않았다네.”라는 구절을 특히 훌륭하고, 시구에 힘이 있고 굳센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금강산 헐성루(金剛山 歇惺樓)
無數飛騰渾欲怒(무수비등혼욕로) 무수히 날아오르며 크게 화를 내려 하고,
有時尖碎不勝孤(유시첨쇄불승고) 때로 뾰쪽하게 솟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네.
夕陽到頂光難定(석양도정광난정) 석양이 꼭대기에 이르면 빛이 흩어지고,
殘雪粘鬟態各殊(잔설점환태각수) 잔설이 머리에 내리니 각각의 빼어난 자태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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