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성 대종사는 만해 한용운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으로 한국불교 중흥을 이끈 불교계 대종사로서 그의 업적은 철저한 수도정신, 민족운동, 역경, 사상서 집필, 포교, 불교정화에도 앞장서신 당대 스승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다간 위대한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백용성 진종 대종사의 행장은 (재)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대각사상연구원 자료를 참조하였으며, 그 분이 남긴 게송 몇 수를 붓글씨로 자서해 보았다.
백용성 진종 대종사 행장(白龍城 震鍾 大宗師 行狀)
백용성(白龍城, 1864. 5. 8 ~ 1940. 2.20)은 대한민국 일제강점기 때의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 불교 대표 2인으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백상규(白相奎)이며 용성은 법호이다. 법명은 진종(震鍾)이다.
전라도 장수군 번암면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전라도 남원군 송동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6세에 출가하여 해인사로 들어가 선종과 교종을 함께 공부하였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또한 불교를 발전시키려면 농사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함양에 화원과 과수원을 만들었으며, 북간도에도 농장을 만들었다.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의 님은 부처님이라는 뜻인데, 독립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간청에는 침묵한 채, 참선만 하고 앉아 있는 깨달은 사형에 대해 쓴 것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수원 백씨(水原 白氏)의 후예로서 휘(諱)는 남현(南賢)공이요 어머니는 신라 6부 촌장의 한 분이신 무산 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공의 후예인 밀양손씨(密陽孫氏)이시다.
대각응세 임신년 9세(서기 1872년)
용성대사 어린 시절.
서당(書堂)에서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시제(詩題)는 합죽선(合竹扇)인 바
대뇨합죽선 차래동정풍(大撓合竹扇 借來洞庭風)합죽선 부채를 크게 흔들어서 동정호 바람을 빌려 오리라」라는 시를 짓고
봄날 어린이들이 진달꽃 따는 것을 보고
적화수리동춘심(摘花手裏動春心) 꽃을 따서 손에 잡으니 봄 마음이 동하는구나 라는 천재적인 즉흥시를 읊어 문장의 재질이 뛰어남이 원근에 알려져 그 영특함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정축년 14세(서기 1877년)
용성대사께서는 출가하여 출가시(出家詩)를 이렇게 읊었다.
출가시(出家詩)
不忘前世事(불망전세사) 전세사를 잊지 아니하고
夢中佛授記(몽중불수기) 꿈가운데 부처님이 수기하셨도다
出家德密庵(출가덕밀암) 덕밀암에 출가하니
其佛親夢佛(기불친몽불) 그 부처님이 꿈에 친견한 부처님이로다
기묘년 16세(서기 1879년)
용성대사께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뜻으로 분별하는 이 알음알이인 지적(知的) 미혹(迷惑)에서 벗어나 버린 경지에 이르러 견도하시고 이 경계에 이르러 견도송(見道頌)을 읊으시니 이러하다.
견도송(見道頌)
五蘊山中尋牛客(오온산중심우객) 오온산인 몸 생각 뜻 가운데서 심우 불성을 찾는 나그네가
獨坐虛堂一輪孤(독좌허당일륜고) 텅 빈 집에 둥근 달이 훤히 비치는데 홀로 앉았도다
方圓長短誰是道(방원장단수시도) 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은 이것이 누구의 도이랴
一團火炎燒大千(일단화염소대천) 일단 '이뭣고'의 불꽃이 대천 번뇌를 태우는 도다
갑신년 21세(서기 1884년)
용맹 결사 정진 끝에 정(情)에 사로 잡히지 않고 뜻[意]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수도(修道)를 마치고 수도송(修道頌)을 읊으시니 이러하다.
수도송(修道頌)
排雲粇霧尋文殊(배운확무심문수) 번뇌의 먹구름을 물리치고 망상의 안개 덫을 놓아 불성을 찾아
始到文殊廓然空(시도문수확연공) 비로소 불성 있는데 이르러니 확연히 공이로다
色色空空還復空(색색공공환부공) 색색공공(色色空空)이 다시 공(空)으로 돌아가고
空空色色重無盡(공공색색중무진) 공공색색(空空色色)이 거듭 다함이 없도다
병술년 23세(서기 1886년)
8월 신라불교 초전법륜 성지(聖地)인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동 아도모례원 모례샘 근처에서 용맹 결사 정진 끝에 진실(眞實)의 지견(知見)이 열리어 보리도(菩提道)를 증오(證悟)한 오도(悟道)를 하시고 낙동강을 건너시면서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시었다.
오도송(悟道頌)
金烏千秋月(금오천추월)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洛東萬里波(낙동만리파)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漁舟何處去(어주하처거)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依舊宿蘆花(의구숙로화) 예와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신유년 58세(서기 1921년)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용성 진종 대종사께서 대각응세 신유년 58세시 서기 1921년 3월에 기미년 3.1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옥고를 치르고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출옥하였다. 4월에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역경불사(譯經佛事)에 착수하시고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승려들에 의해 우리나라 전통불교가 퇴색되고 일본 불교화 되어가고 있을 뿐더러 국내에서는 이씨조선 배불정책의 뿌리가 완전히 없어지지 아니하여 스님들을 천시하고 불자(佛子)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현상이 나타났다. 용성대사께서는 이러한 병폐를 없애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온 겨레의 마음속에 심어 주기 위하여 새 불교 운동을 전개하고자 불교의 불(佛)을 번역하면 대각(大覺)이기 때문에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우리나라 불교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대각교 본부는 서울 종로 봉익동 3번지 대각사(大覺寺) 이다.
용성 대사께서 대각교를 창립하면서 화공(畵工) 동호(東湖) 거사를 불러 대사의 진영(眞影)을 그리게 하고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당시의 정계를 희롱하였다.
水水山山爾形(수수산산이형) 물과 물 산과 산은 부처님 모습이요
花花草草爾意(화화초초이의) 꽃과 꽃 풀과 풀은 조사님 뜻이로다
等閑來等閑居(등한래등한거) 한가로움을 기다려 왔다가 한가로움을 기다려 가는데
明月照淸風拂(명월조청풍불) 달이 밝게 비침을 맑은 바람이 도웁는구나
拘子無佛性(구자무불성) 개새끼에게 불성이 없다 함은
趙州妄分別(조주망분별) 조주선사의 망령된 분별이요
東湖春水錄(동호춘수록) 동호의 봄 물은 푸르른데
白鷗任浮沈(백구임부침) 백구는 뜨고 잠김을 임의로 하는구나
我是汝耶(아시여야) 내가 이 너인가
汝是我耶(여시아야) 네가 이 나인가
草堂春日暖(초당춘일난) 초당의 봄날이 따뜻하니
百花爛慢開(백화난만개) 백화가 익어 방자하게 피었도다
대각응세 경진년 77세(서기 1940년)
임종게(臨終偈)
제행지무상(諸行之無常)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지구적(萬法之俱寂) 만법이 다 고요 하 도다
포화천리출(匏花穿籬出)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한와마전상(閑臥麻田上)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 도다
라는 임종게(臨終偈)를 읊으시고 나서 시자여, 대중이여, 그 동안 수고했 도다 나는 간다 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빙긋이 웃으며 입적(入寂)하시니, 세수(世壽)는 77세요 법랍(法臘)이 61세이셨다.
용성대종사께서는 1864년 5월 8일 전라도 남원군(현재 장수군) 하번암면 죽림리에서 수원 白氏로 탄생하였다. 7세에 한학을 익혔으며, 9세에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으며, 23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전국 각 사암들을 찾아다니면서 수도 정진하였으며, 44세 때에는 중국불교계의 선지식들과도 불법의 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47세에는 귀원정종(歸源正宗)이란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불교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해석하고 논박한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한 선사는 산중 수행을 정리하고 1911년 1911년 46세 되던 해에 서울로 상경하여 신도집에 머물면서 도회지 참선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종로구 봉익동에 민가를 구입해서 수리 개조하여 大覺寺의 간판을 내걸고 불교중흥과 민족중흥을 발원하여 불교계의 혁신작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는 만해 한용운스님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중 불교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4번째 서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영어(囹圄)의 생활을 하였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한문으로 되어있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1922년 서울 봉익동 1번지에 대각교당을 설립하였으며, 삼장역회를 통해 많은 저서를 발간하였다. 1924년 61세 되던 해에는 평소의 수행력에 의해 차아에서 齒舍利가 나왔으며, 62세에는 도봉산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를 조직하여 수행에도 전력을 다하였다. 1926년에는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고 있던 왜색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건백서( 建白書)를 2차에 걸쳐서 제출하여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1927년 64세 때에는 대각교의식집(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왕생가(往生歌), 권세가(勸世歌) 등 창작국악조의 창작찬불가(創作讚佛歌)를 최초로 작시, 작곡하여 이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大覺寺에 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치기도 하였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 제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노래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2곡만이 악보까지 남아있으며, 그 외에는 가사만 전하고 있다. 대종사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찬불가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국악조의 창작국악으로 된 창작찬불가를 남겼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같은 해 함양에 화과원(華果院)을 만들어 사원경제의 자립을 부르짖은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후 30여 가지의 경전을 번역하였으며, 30여 가지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2월 24일 대각사에서 입적하니 세수는 77세이고, 법랍은 61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수한 전등(傳燈) 68代의 조사(祖師)인 동시에 근세 중흥율(中興律)의 6祖이다. 1941년에 만해 한용운이 撰한 비를 해인사에 건립하였으며, 1962년 3월 1일에는 국가공로상(國家功勞賞)이 추서 되었고, 그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제자들은 1969년 9월 11일에 문화공보부로부터 재단법인 대각회(大覺會)를 인가 받았다. 1990년 10월 9일에는 총무처로부터 은관문화훈장(銀冠文化勳章)을 추서 받았고, 같은 날 한글학회로부터 감사패를 추서 받았다. 저서로는 수심론(修心論), 어록(語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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