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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백사 이항복 시 3수 : 산수도, 추일유도봉산, 좌야(白沙 李恒福 詩 3首 : 山水圖, 秋日遊道峯山, 坐夜)

주말농장 귀퉁이에 두 달 전에 완성한 조그마한 닭장에 부화한 지 6 주령 토종닭 15마리를 방사했다. 닭들이 더 나은 환경으로 왔다고 판단해 서인지 금방 적응하는 모양새다.
암수 비율은 14:1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고 하나 보통 10~20:1 정도면 무난하리라 본다.
닭은 닭목 꿩과에 속하는 가축화된 새이며, 적색야계의 아종이다.
닭은 가장 흔하고 널리 퍼져 있는 가축 중 하나이다. 미국의 통계 전문 기관인 스테티스타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지구상에 최소 227억 마리의 닭이 존재하며, 이는 다른 어떤 조류보다도 수요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인간은 닭을 주로 고기와 알과 같은 식품을 얻기 위해 기르며, 드물게는 반려동물로 키우기도 한다.
닭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기원전 6000~8000년 즈음 동남아시아 일대에 서식하던 야생 적색야계가 인간에 의해 가축화되어 지금의 닭이 되었다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
닭은 시각과 청각이 예민하지만, 후각은 사람보다 좋지 않지만 미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닭은 먹이를 모이주머니에 저장했다가 천천히 위로 내려보낸다. 소화액과 섞인 먹이는 모래주머니로 들어가며 모래주머니는 위의 근육질 부분으로 닭이 삼킨 모래나 돌멩이가 들어 있다. 이러한 알갱이와 모래주머니의 벽이 움직여서 먹이를 갈아서 잘게 만들어 소화시킨다.
닭의 수명은 보통 7~12년 정도이지만 양계장에서 기르지 않는 닭이라면 15년에서 아주 길게는 25년 정도의 수명이다.
닭은 일부다처제이며 5~15마리 정도 무리를 짓고 산다. 알은 품종마다 다르지만 1년에 200개 정도 낳는다. 알은 암탉이 품기 시작한 지 21일이 되면 부화하며, 수탉은 4개월이면 울기 시작하고 암탉은 보통 6개월 정도 되면 알을 낳기 시작한다.
머리가 작아서 지능이 낮아 보이지만 연구결과 지능이 매우 높은 동물로 사고능력이 영장류와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고 추론과 유추능력은 7살 아이 수준이라니 놀랍다.
 
여기서 키우는 닭은 식용이 아닌 채란(採卵)과 자연부화가(自然孵化) 목적이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오래도록 함께 할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한시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시로 산수도(山水圖)와 추일유도봉산(秋日遊道峯山), 좌야(坐夜)  3수를 살펴보고자 하며 주말농장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산수도(山水圖 : 산수화)

江虛月露明(강허월로명) 빈 강 달 아래 이슬은 밝고
夜久松杉寂(야구송삼적) 깊은 밤, 소나무 삼나무 숲 고요하다.
漁人未歸來(어인미귀래) 어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浪擊溪頭石(랑격계두석) 물결은 시냇가의 돌을 치며 흐르네
驢後小兒隨(려후소아수) 당나귀 뒤에는 어린아이 따라가고
驢前風日好(려전풍일호) 당나귀 앞에는 시원한 바람 불어와 날씨가 좋다.
無人語所思(무인어소사) 생각난 것 이야기 나눌 사람 아무도 없어
獨自行長道(독자행장도) 혼자서 먼 길을 가야만 하는구나
落雁帶斜景(락안대사경) 내려앉는 기러기 석양빛을 띠고
雲濤浮遠空(운도부원공) 구름 같은 파도는 먼 공중에 떠 있도다.
無心坐篷底(무심좌봉저) 무심히 봉창(蓬窓) 아래 앉으니
何處是江東(하처시강동) 어느 곳이 곧 강동 땅이란 말인가.
 
산수도(山水圖) 시는 당시 도화서 화원(圖畵署 畵員)으로 그림에 능했던 *이흥효(李興孝, 1537 ~ 1593) 또는 *이정(李楨, 1578~1618)이 그린 산수화를 보며 지은 시로 판단된다.
 
추일유도봉산(秋日遊道峯山 : 가을날 도봉산에서 노닐며)

逕側孤槎擁(경측고사옹) 길은 외로운 뗏목이 막힌 데서 기울고
溪廻小洞陰(계회소동음) 시내는 작은 골짝 음지로 돌아 흐르네
楓酣山氣富(풍감산기부) 단풍 짙으니 산 기운이 풍부하고
藤暗水聲深(등암수성심) 등덩굴 침침하니 물소리가 깊구나
得意時忘語(득의시망어) 뜻을 얻으면 때로 말하길 잊고
懷人亦廢吟(회인역폐음) 사람을 생각하면 읊는 것도 폐하네
淸流玩魚樂(청류완어락) 맑은 물에 고기 구경하기 즐거우니
至理在無心(지리재무심) 지극한 이치는 무심한 데 있다오
 
좌야(坐夜 :  밤에 앉아서)

外物日千變(외물일천변) 외물은 날마다 수없이 변하는데
此心長寂寥(차심장적요) 마음은 오래도록 적료하구나.
床頭燈烱烱(상두등경경) 책상 앞의 등불은 빛나고
窓下雨蕭蕭(창하우소소) 창문 아래 비는 쓸쓸히 내린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 ~ 1618)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靑華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 백사공파(百沙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를 수행하여 의주까지 피난을 다녀왔으며, 호성공신(扈聖功臣 :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위하여 따랐던 공으로 이항복 등 여든여섯 사람에게 내린 훈호(勳號))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참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 및 영창대군, 임해군 처단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중풍으로 병사하였다. 공신 책록 경력으로는 1604년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 1608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죽마고우 이덕형과의 우정 이야기 오성과 한음(鰲城과 漢陰) 대감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형조판서와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어나서 사흘 동안은 울지도 않고 젖을 먹지도 않아 모두들 걱정을 하였는데, 점성술사가 보고 장차 큰 인물이 될 아기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는 해학에도 뛰어나 만인의 귀염을 받았음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9세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으나 16세에는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어린 시절에는 놀기를 좋아하여 동네 불량배의 우두머리로 세월을 헛되게 보냈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정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을 치른 뒤 학궁(學宮 : 조선 시대에, 유학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에 들어가 학문이 더욱 이루어졌다. 영의정을 지낸 권철은 이항복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이항복의 인물됨됨이를 알아본 권철(權轍)은 아들 권율에게 이항복을 사위를 삼도록 권하여 이항복은 19세에 권율의 딸과 혼인하였다.
 
1580년(선조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1년 검열(檢閱 : 군기, 교육, 작전 준비, 장비 따위의 군사 상태를 살펴보는 일)이 되었다. 이 해에 이덕형도 20세에 문과에 을과 1인으로 급제하여 함께 벼슬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82년(선조 15년)에는 장인어른인 권율도 46세에 문과에 병과 1인으로 급제하여 뒤늦게 벼슬을 시작한다.
 
과거 급제 이듬해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1583년에는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친구인 이덕형과 함께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했다. 또 홍문관인 옥당(玉堂 : 조선 시대 홍문관(弘文館)을 달리 이르는 말)의 벼슬아치로 천거(薦擧) 받았다.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어 전곡(錢穀)의 출납에 밝았으므로 판서 윤두수(尹斗壽)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이후 1589년 예조정랑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어지러운 붕당 정치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고 슬기와 인내로써 항상 조심하였으며, 본디 재치와 익살이 뛰어난 인물인지라, 그의 우스갯소리에는 모두들 웃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건저사건(建儲事件 : 1591년(선조 24)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서분당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나 정철(鄭澈)이 수괴(首魁)로 몰리게 되었는데 친구들이 찾아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항복이 꺼림 없이 방문했으며, 승지(承旨) 때 정철의 죄안(罪案)을 처리하는 데 태만하였다고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35세인 1590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로서 선조를 모시고 개성으로 피난을 갔고, 의주로 피난 가는 도중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랐다. 다시 두 왕자들을 모시고 먼저 평양으로 가서 형조판서(刑曹判書)에 특진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권을 얻게 되었다.
 
이때 조선 정부에서는 선조를 함흥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명나라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는 영변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영변과 정주를 거쳐 의주에 이르렀다. 의주에서 명나라에서 들어온 황응양(黃應暘)에게 조선과 일본이 협력하여 중국을 치려 한다는 유언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고 구원의 대병이 이르게 하였다. 그동안 형조판서를 거쳐 전란 중, 이덕형(李德馨)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맡으며 명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동시에 왕실 근위대 정비에 전력을 다하고 올바른 정치로 선조를 보필하였다. 그리고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참찬(右參贊) 등도 했다.
 
그 공으로 우의정이 되었으며, 왜란이 끝난 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올랐다.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무고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자진하여 영의정 벼슬을 내놓았는데 예우(禮遇)는 그대로 받아 큰일에는 왕이 자문을 받았다.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으로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정응태는 명나라 구원병 책임자로 조선에 와 있던 양호(楊鎬) 장군과 갈등하던 중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허위로 보고를 했다. 만약 명나라가 지원군을 회군한다면 전력에 손실이 나타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이항복은 당시 공조참판인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書狀官)으로 대동하고 명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명나라로 하여금 정응태를 파면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다.
 
1604년(선조 34) 임진왜란 관련 신하들을 포상할 때 그는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1605년 청난원종공신 1등에 책록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柳永慶)의 옥사 직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재직 중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 되었다. 이후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며 물러났다가 다시 우의정을 거쳐서 좌의정이 되었다.
 
계축옥사(癸丑獄事) 당시 좌의정을 겸하면서 훈련도감(訓鍊都監) 도제조(都提調)와 체찰사(體察使)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항복은 임해군의 사사 때 정인홍 등의 탄핵을 받았고, 영창대군의 사사와 인목대비 폐서인(廢庶人) 사건이 논의될 때 이들에게 온갖 정성과 지혜를 경주했으며 목숨까지 바쳐가며 적극적으로 구제하고자 하였다. 국모를 폐위하는 논의가 결정되어 인목대비가 폐모 되어 서궁에 갇히는 반인륜적인 사건이 발발하자 이항복은 비로소 글을 올려 극력 부당함을 간하였다.
 
평생토록 당쟁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대북파에 의해서 폐모론이 거론되자 이에 반대하며 서인(西人)에 가담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의 폐위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다가 1617년 12월 21일(음력 11월 24일) 관직을 삭탈당하고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중풍이 재발하여 반신불수의 몸이 되고, 조정은 이항복의 신병 처리에 당황해했다. 1617년 음력 12월 16일(양력 1618년 1월 12일) 이항복의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위리안치(圍籬 安置)의 명이 떨어진 이후 계속 유배지를 옮겨 다니며 17일 용강, 18일, 흥해, 21일 창성, 24일 경원, 28일 삼수로 다니다가 1618년 1월 31일(음력 1월 6일)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광해군은 7월 9일(음력 5월 18일) 이덕형 사후의 예에 따라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고 예장(禮葬)을 함은 물론 경유지마다 관에서 운구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 사후 정충신(鄭忠信)이 이항복의 시신을 수행했는데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으로 8월 7일(음력 6월 17일) 출발하여 8월 31일(음력 7월 12일) 도착했다. 묘(경기도 기념물 제24호)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 4번지에 있다.
상신록(相臣錄)에 실렸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북청과 포천의 선비들이 각각 사당을 세워 모셨으며, 효종 때부터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노덕서원 (老德書院)등지에 제향 되었다. 한음 이덕형 가문과의 우의는 지금도 이어지며 정인보(鄭寅普) 가계와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 후손에 이광좌(李光佐), 이태좌(李台佐), 이종성(李宗城), 이경일(李敬一), 이유원(李裕元)은 정승에 올랐으며 소론의 명문가로서 독립운동가인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형제도 이항복의 후손이다.
생애는 연보 및 계곡 장유(谿谷 張維)가 쓴 행장과 상촌 신흠(象村 申欽)이 쓴 신도비명에 “항복은 호걸스럽고 시원한 성품에 넓은 아량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젊어서는 이덕형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으며 문학(文學)으로 두 분이 함께 진출하여 현달했다. 정철은 항상 상서로운 기린과 봉과 같은 사람이라고 칭했다.”
 
*이흥효(李興孝, 1537 ~ 1593)는 조선 중기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이다. 자는 중순(仲順),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부친은 이상좌(李上佐)이며, 이숭효는 형이며, 이정(李楨)은 조카이다. 이배련의 아들이라 전하기도 한다. 허균이 찬한 이정애사(李楨哀詞 :  화가 나옹 *이정(懶翁 李楨, 1578~1618)이 30세로 요절하자 이를 애도하기 위하여 지은 詞)에 의하면, 형 이숭효(李崇孝)가 일찍 죽자 조카인 이정(李楨)을 맡아 양육하며 화가로 대성시켰다고 한다. 이흥효에게는 아들 셋과 딸 넷이 있었는데 그중 막내아들 이계(李桂)가 화업을 이었다.
이흥효는 도화서 화원으로서 명종과 선조대에 활동하였는데, 허균이 지은 묘지명인 「증공조판서행대호군이군묘갈명(贈工曹判書行大護軍李君墓碣銘)」에 자세한 내력이 전한다. 이흥효는 명종대에 중종의 초상을 그린 일로 대비 문정왕후의 마음에 들어 내수사 서제(書題)로 발탁되었고 농토를 하사 받았다. 1572년에 수문장에 특별 제수되어 품계가 어모장군(御侮將軍)에까지 올랐고 호군으로 원종광국공신(原從光國功臣)에 녹훈되었다. 사후 공조판서행 대호군으로 추증되었다.
 

(주말농장 풍경)

김장용 배추, 무가 땅힘을 받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일본나팔꽃
나팔꽃
차요테 넝쿨
무수히 맺힌 차요테꽃
농장 모퉁이에 설치한 닭장
6주령 15마리(숫컷 2마리) 방사. 4~5개월 후 산란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