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만절당 박원형(晩節堂 朴元亨) 시 와 몽심재(夢心齋)

청빈한 관리의 표상인 박원형(朴元亨. 1411~1469)은 본관 죽산(竹山), 자 지구(之衢), 호 만절당(晩節堂), 시호 문헌(文憲)이다. 1432년(세종 14) 사마시를 거쳐 1434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도염서령(都染署令), 의금부도사,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 겸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사복시판사, 좌승지 겸 형조지사(刑曹知事)를 지내고 1451년 사가독서(賜暇讀書 :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토록 함)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부승지를 거쳐 도승지로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고 1459년(세조 5)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하여 이조참판이 되어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지고, 호조,형조,이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지냈다. 1466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예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그는 평소 청빈을 고집하였던 터라 집안은 형편 없었다. 심지어 도둑이 들어왔다가 그냥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할 정도이다. 그의 이러한 생활상을 전해들은 세조는 민망히 생각하며, 각별히 집 한 채와 채단을 하사하여 생계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그가 찬성으로 있을 때다. 아들인 박안성(朴安性)이 부친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상을 차리고 헌수하였다. 이때 그는 기꺼이 받아 마시며 시 한 수를 부르며 받아 적게 하였는다. 그후 몇일 지나 세상을 마쳤는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자손들에게 남긴 유언이 되었다. 훌륭한 선조의 교훈을 거울삼아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 후손의 책무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그 시를 행서로 자서해 보았다.

 

- 박원형 의 유시(朴元亨 遺詩)

今度燈前酒一巡(금도등전주일순) 오늘밤 등불 앞에 한 순배 술을 드니

汝年三十六靑春(여년삼십육청춘) 네 나이 헤아리니 서른 여섯 청춘이구나  

吾家寶物惟淸白(오가보물유청백) 우리 가문의 보물은 오직 청백 뿐이니

好把相傳無限人(호파상전무한인) 이를 잘 지켜서 오래도록 전하거라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사로 모신 죽산박씨 종손이신 분이 계셨는데 남원 죽산박씨 종가(南原 竹山朴氏 宗家)를 보존 관리해야 할 책무를 타고 나셨다. 평소 선조에 대한 자긍심과 온화한 성품으로 동료지간에 존경의 대상이셨다. 그분이 거주했던 종택내 몽심재(夢心齋)가 있는데 이는 연당(蓮堂) 박동식(朴東式)이 건립했으며, 당호인 몽심재는 그의 14대조인 두문동 72현(賢)의 영수인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의 싯구에서 따왔다. 松菴은 1353년 고려말 충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가정대부찬성사 우정승에 이르렀으며, 일찍이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3노(삼노)로 불릴 만큼 우정이 두터웠다고 한다. 몽심재는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元亮)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격동유면원량몽隔洞柳眠元亮夢/등산미토백이심登山薇吐伯夷心)"에서 도연명과 백이와 숙제의 지조와 고결한 성품을 따르고자 포은 정몽주에게 보낸 시의 첫줄 끝자인 몽(夢)과 둘째줄 끝자인 심(心)자를 빌려 몽심재(夢心齋)라 했다고 전해진다. 죽산박씨의 충절과 청빈적 교훈이 담긴 내용이라 같이 기재해 보았다.

隔洞柳眠元亮夢(격동유면원량몽)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元亮)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登山薇吐伯夷心(등산미토백이심)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