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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윤기 독서의 변(尹愭 讀書의 辨)

그처럼 무더웠던 더위도 어김없이 계절의 순환의 고리에 편성하여 물러가고 조석으로 제법 서늘해진 요즘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 되었다. 한동안 바쁜 일정을 핑계로 책 읽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든다. 

하기야 문명의 이기인 인터넷의 환경에서 수없이 실시간 정보를 접하는 시대에 살다 보니 차츰 책보다는 휴대폰에 손이 많이 가는 게 현실이다. 

고인들의 독서에 대한 원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분이 윤기(尹愭,1741~1826.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부(敬夫), 호는 무명자(無名子) 벼슬이 호조참의에까지 이르렀다. 저서로 무명자집  20권 20 책이 있다.)이다. 

독서의 원칙은 무명자집(無名子集) 제10 책 독서의순서(讀書次第)에 옛사람들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하여 자신의 인성함양과 지혜의 터득을 학문의 목적으로 삼았다지만 조선 후기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가 보다. 

양반가에서는 어려서 글자를 익힌 뒤 경서, 역사서, 문학서 각 한두 권씩 배워 문장 짓는 재주만 조금 보이면 모두 과거(科擧)에 전념하였고 이를 통해 문호를 지키고 집안을 이끌어 가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좋게 보지 않았던 윤기는 위의 글에서 독서하는 순서를 정리했다. 글자를 익힌 다음에는 사략(史略) 초권과 소학(小學)을, 그다음은 사서(四書)와 오경(五經) 및 참고해야 할 경서(經書)와 송유(宋儒)들의 저서를, 그다음은 중국의 주요 역사서와 문장가들의 저술 및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섭렵해야 한다는, 단계적인 독서 순서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에 덧붙여 “오직 많이 읽어 자연히 입에 붙어서 오래되어도 잊지 않아야 한다.”라는 주자(朱子)의 말도 잊지 않았으니 체계적인 다독(多讀)과 숙독(熟讀)을 원칙으로 삼은 것이다. 

참으로 마음에 와 닫는 내용이다. 또한 일상에 매여 독서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누군가에 변명에 윤기는 다음과 같이 답한 글이 있어 이를 행서로 자서 해보았다.

 

부독서(不讀書)에 대한 변(辨)                    - 윤기(尹愭)

 

古人有朝耕夜讀者(고인유조경야독자) 고인 중에 아침에 밭 갈고 밤에 독서한 사람은

有帶經而鋤者(유대경이서자) 경전을 끼고 김을 맨 사람

有擔薪行誦者(유담신행송자) 땔나무를 지고 다니며 암송한 사람

有病中讀書者(유병중독서자) 질병 속에서 독서한 사람

有獄中受書者(유혹중수서자) 옥중에서 글을 배운 사람도 있었으니

豈有長時拘掣於事故(기유장시구체어사고) 어찌 오래도록 사고(事故)에 얽매여 읽고 싶어도

欲讀不能者耶(욕독불능자야) 읽지 못한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直患無志耳(직환무지이) 다만 의지가 없는 것이 근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