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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다산 정약용 시 불역쾌재행(茶山 丁若鏞 詩 不亦快哉行)

오늘 아침 싸라기눈 내린 뒤 오후 들어 구름 한 점 없이 개였는데 이른 쾌청(快晴)한 날씨라 부르 듯 쾌(快)자가 들어가는 단어는 항상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의학에서는 건강의 가장 기본이 되는 3쾌(三快)를 꼽는데 3쾌는 잘 먹고(쾌식, 快食), 잘 자고(쾌면, 快眠), 잘 배변하는(쾌변, 快便)것이다. 또한 아주 즐겁고 행복한 3쾌를 유쾌(愉快), 상쾌(爽快), 통쾌(痛快)라 하듯이 다산(茶山)선생 또한 이와 관련된 시 불역쾌재(不亦快哉) 20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불역쾌재는 김성탄(金聖歎 : 1610 ~ 1661 명말 청초(明末 淸初)의 문예비평가)의 불역쾌재삼십삼칙(不亦快哉三十三則 : 33가지 행복한 순간)을 빌려와 다산이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을 지었다. 불역쾌재삼십삼칙은 김성탄이 절친인 왕착산(王斲山) 함께 어느 날 열흘 비에 발이 묶인 산사(山寺)에서 친구와 정담을 나누다 지나온 인생의 행복한 순간을 33가지를 꼽아보며 지은 문장으로 그 중 한가지를 살펴보면 동야음주 전부한심(冬夜飮酒 轉復寒甚 : 겨울 밤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몹시 추워) 추창시간 설대여수(推窓試看 雪大如手 : 창을열고 내다보니 함박눈이 내려) 이적삼사촌의 불역쾌재(已積三四寸矣 不亦快哉 : 이미 3~4촌(1촌 : 약 3Cm)이나 쌓이고 있으면 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이다.

즐거운 벗과 함께 소소하게 술 한잔 나누며 서로 지난 일들을 살펴보는 것 또한 한 겨울에 느끼는 정겨운 담론(談論)이 아니겠는가?

其一.
跨月蒸淋積穢氛(과월증림적예분) 달포 넘게 찌는 장마 오나가나 곰팡냄새
四肢無力度朝曛(사지무력도조훈) 사지에 맥이 없이 아침저녁 보내다가
新秋碧落澄寥廓(신추벽락징요곽) 가을 되어 푸른 하늘 맑고도 넓으면서
端軸都無一點雲(단축도무일점운) 하늘 땅 어디에도 구름 한 점 없으면
不亦快哉 (불역쾌재) 그 얼마나 상쾌할까?

其二.

疊石橫堤碧澗隈(첩석횡제벽간외) 산골 시내 굽이진 곳 돌무더기 가로막혀
盈盈滀水鬱盤迴(영영축수울반회) 가득히 고인 물이 빙빙 돌고 있는 것을
長鑱起作囊沙決(장참기작낭사결) 막고 있는 모래주머니 긴 삽으로 툭 터서
澎湃奔流勢若雷(팽배분유세약뢰) 우레처럼 소리 내며 쏜살같이 흘러가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통쾌할까?

其三.
蒼鷹鎖翮困長饑(창응쇄핵곤장기) 날개를 묵히면서 굶고 있는 푸른 매가
林末毰毸倦却歸(임말배시권각귀) 숲 끝에서 날개 쳐도 갈 곳 별로 없다가
好就朔風初解緤(호취삭풍초해설) 매서운 북풍에 처음으로 줄을 풀고
碧天如水盡情飛(벽천여수진정비) 바다 같은 푸른 하늘 마음껏 날아갈 때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유쾌할까?

其四.
客舟咿嘎汎晴江(객주이알범청강) 삐걱삐걱 노 저으며 청강에 배 띄우고
閒看盤渦浴鳥雙(한간반와욕조쌍) 쌍쌍이 무자맥질하는 물새들을 보다가
正到急湍投下處(정도급단투하처) 쏜살같이 내닫는 여울목에 배가 와서
涼颸拂拂洒篷牕(양시불불쇄봉창) 시원한 강바람이 뱃전을 스쳐 가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상쾌할까?

其五.

岧嶢絶頂倦游筇(초요절정권유공) 깎아지른 절정을 힘겹게 올랐을 때
雲霧重重下界封(운무중중하계봉) 구름 안개 겹겹으로 시야를 막았다가
向晩西風吹白日(향만서풍취백일) 이윽고 서풍 결에 태양이 눈부시고
一時呈露萬千峯(일시정로만천봉) 천봉만학 있는 대로 일시에 다 보이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상쾌할까?

其六.
嬴驂局促歷巉巖(영참국촉역참암) 야윈 말이 힘겹게 험한 길을 지나면서
石角林梢破客衫(석각임초파객삼) 돌부리 나뭇가지에 옷자락이 찢겼는데
下馬登舟前路穩(하마등주전로온) 말에서 내려 배를 타고 평온한 앞 길 따라
夕陽高揭順風帆(석양고게순풍범) 석양 하늘 순풍에 돛을 높이 달고 가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유쾌할까?

其七.

騷騷木葉下江皐(소소목엽하강고) 낙엽은 우수수 강 언덕에 떨어지고
黃黑天光蹴素濤(황흑천광축소도) 우중충한 날씨에 흰 파도가 넘실댈 때
衣帶飄颻風裏立(의대표요풍리립) 옷자락 휘날리며 바람 속에 섰노라면
怳疑仙鶴刷霜毛(황의선학쇄상모) 하얀 깃을 쓰다듬는 선학과도 같으리니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상쾌하랴!

其八.
隣人屋角障庭心(인인옥각장정심) 이웃집 처마 끝이 앞마당을 막고 있어
涼日無風晴日陰(양일무풍청일음) 여름날도 바람 없고 맑은 날도 그늘진 것을
請買百金纔毁去(청매백금재훼거) 백금으로 사들여서 모두 다 헐어내고
眼前無數得遙岑(안전무수득요잠) 먼 산 묏부리들이 눈앞에 훤하게 하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시원할까?

其九.
支離長夏困朱炎(지리장하곤주염) 지루한 여름날 불볕더위에 시달려
濈濈蕉衫背汗沾(즙즙초삼배한첨) 등골에 땀 흐르고 베적삼이 축축할 때
洒落風來山雨急(쇄락풍래산우급) 시원한 바람 끝에 소나기가 쏟아져
一時巖壑掛氷簾(일시암학괘빙렴) 얼음발이 단번에 벼랑에 걸린다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상쾌할까?

其十.
淸宵巖壑寂無聲(청소암학적무성) 깊은 골에 밤이 들어 죽은 듯이 고요하고
山鬼安棲獸不驚(산귀안서수불경) 귀신도 잠이 들고 짐승들도 기척 없을 때
挑取石頭如屋大(도취석두여옥대) 집채 같은 큰 바위를 두 손 번쩍 들어다가
斷厓千尺碾砰訇(단애천척년팽굉) 천 척 낭떠러지를 매질하듯 울려보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통쾌할까?

其十日.
局促王城百雉中(국촉왕성백치중) 장안의 성 안에서 움츠리고 지내기를
常如病羽鎖雕籠(상여병우쇄조롱) 병든 새가 조롱 속에 갇혀 있듯 하다가
鳴鞭忽過郊門外(명편홀과교문외) 채찍을 울리면서 교문 밖을 썩 나서면
極目川原野色通(극목천원야색통) 산천과 들 빛이 눈에 온통 다 보일 때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통쾌할까?

其十二.

雲牋闊展醉吟遲(운전활전취음지) 흰 종이를 활짝 펴 두고 시상에 지그시 잠겼다가
草樹陰濃雨滴時(초수음농우적시) 우거진 녹음 속에 비가 뚝뚝 떨어질 때
起把如椽盈握筆(기파여연영악필) 서까래와 같은 붓을 손에 잔뜩 움켜쥐고
沛然揮洒墨淋漓(패연휘쇄묵림리) 먹물이 흥건하게 일필휘지 하고 나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유쾌하랴?

其十三.
奕棋曾不解贏輸(혁기증부해영수) 장기 바둑 승부수를 내 일찍이 모르기에
局外旁觀坐似愚(국외방관좌사우) 곁에서 물끄러미 바보처럼 앉았다가
好把一條如意鐵(호파일조여의철) 한 자루 여의철을 손으로 움켜잡고
砉然揮掃作虛無(획연휘소작허무) 단번에 판 위를 확 쓸어 없애 버리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통쾌할까?

其十四.

篁林孤月夜無痕(황임고월야무흔) 대숲 위에 외로운 달 소리 없이 밤 깊을 때
獨坐幽軒對酒樽(독좌유헌대주준) 초당에 홀로 앉아 술독을 앞에 놓고
飮到百杯泥醉後(음도백배이취후) 한 백 잔 마시다가 질탕하게 취한 후에
一聲豪唱洗憂煩(일성호창세우번) 노래 한바탕 불러대어 근심 걱정 씻어 버리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유쾌할까?

其十五.
飛雪漫空朔吹寒(비설만공삭취한) 눈보라 분분하고 삭풍이 차가워
入林狐兎脚蹣跚(입림호토각반산) 숲 찾아든 여우 토끼 다리 절고 있을 때
長槍大箭紅絨帽(장창대전홍융모) 긴 창에 큰 화살로 홍전립 눌러쓰고
手挈生禽側挂鞍(수설생금측괘안) 산 채로 때려잡아 안장에 꿰차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통쾌할까?

其十六.

漁舟容與綠波間(어주용여록파간) 푸르른 물결 따라 고깃배로 노닐면서
風露三更醉不還(풍로삼경취불환) 야삼경 술에 취해 돌아갈 줄 모르다가
歸雁一聲驚破睡(귀안일성경파수) 가는 기러기 한 소리에 놀라 잠을 깼더니만
蘆花被冷月如彎(노화피냉월여만) 갈꽃 이불 썰렁하고 초승달이 떠 있으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상쾌할까?

其十七.
落盡家貲結客裝(낙진가자결객장) 세간살이 모두 팔아 괴나리봇짐 꾸려지고
雲游蹤跡轉他鄕(운유종적전타향) 뜬구름 신세로 타향을 떠돌다가
路逢失志平生友(노봉실지평생우) 뜻 못 펴고 유랑하는 지기지우 길에서 만나
交與囊中十錠黃(교여낭중십정황) 주머니 속 돈 열 냥을 그에게 꺼내 주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유쾌할까

其十八.
噍噍磌鵲繞林梢(초초전작요임초) 나무 끝을 맴돌면서 어미까치 짖어대고
黑質脩鱗正入巢(흑질수린정입소) 시커먼 구렁이가 둥지로 기어들 때
何處戛然長頸鳥(하처알연장경조) 어디선가 목 긴 새가 왝하고 날아와
啄將珠腦勢如虓(탁장주뇌세여효) 성난 범처럼 머리통을 쪼아대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통쾌할까?

其十九.

琴歌來趁月初圓(금가래진월초원) 달 둥글면 거문고 타고 노래하기로 하였는데
無那頑雲黑萬天(무나완운흑만천) 어찌할까 온 하늘을 먹구름이 다 덮다니
到了整衣將散際(도료정의장산제) 옷을 모두 챙겨 입고 헤어지려 할 즈음에
忽看林末出嬋娟(홀간임말출선연) 숲 끝에 얼굴 내민 예쁜 달을 보게 되면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반가울까?

其二十.

異方遷謪戀觚稜(이방천상연고능) 먼 지방 귀양살이 대궐 못내 그리워서
旅館無眠獨剪燈(여관무면독전등) 여관 한 등 잠 못 이루고 등불만 만지작거린다.
忽聽金鷄傳喜報(홀청금계전희보) 뜻밖에 금계의 기쁜 소식 전하는 말 듣고
家書手自啓緘縢(가서수자계함등) 집에서 보낸 편지를 손으로 뜯었을 때
不亦快哉(불역쾌재) 그 얼마나 흔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