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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다산 정약용 시 2수 독립, 타맥행(茶山 丁若鏞 詩 二首 獨立, 打麥行)

오늘(1월 6일)은가운데 스물세 번째 절기로 작은 추위라는 뜻의 절기인 소한(小寒)이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소한부터 대한까지 15일간을 5일씩 끊어서 3() 나누어 초후(初候)에는 기러기가 북으로 날아가고 중후(中候)에는 까치가 집을 짓기 시작하고 말후(末候)에는 꿩이 운다고 기술하였다이는 중국 황하 유역을 기준으로  것으로 우리나라와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절기의 이름으로 보면 소한 다음 절기인 대한(大寒때가 가장 추워야 하지만실제 우리나라에서는 소한 무렵이 가장 춥다.

 

혹한의 정점인 소한대한을 보내면 입춘인데 1달이 남지 않았다. 얼어붙은 땅속에서 씨앗들은 봄을 기다리며 싹 틔울 준비를 할 것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천재(天才)를 손꼽는다면 단연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으뜸일 것이다.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율곡 이이(栗谷 李珥) 또한 그 반열에 올릴 수 있지만 다방면에서 비교해 본다면 다산을 최고로 평가할 수 있다.  어느 경제인이 말한 바와 같이 1명의 뛰어난 천재는 60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한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가 현세에 다시 태어난다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위와 같이 조선후기 실학(實學) 집대성한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사상가정치가과학자의학자법률가개혁주의자 이자 위대한 천재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남긴 시가 2500편에 달하는데 그중 많이 알려진  2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독립(獨立 : 홀로 서서)

秋山衰颯暮湍哀(추산쇠삽모단애) 가을 산 쓸쓸하고 저녁 여울 처량하여

獨立江亭意味裁(독립강정의미재) 강가 정자에 홀로 서니 마음 추스르지 못하겠네

風鴈陣欹還自整(풍안진의환자정) 바람 따라 기러기 떼는 기울었다 다시 정연하고

霜花莟破未輕開(상화함파미경개) 서리 맞은 꽃은 망울이 터지고도 선뜻 피지 못하네

空懷竹杖游僧院(공회죽장유승원) 대지팡이 짚고 절간을 유람할까 생각하다가

徑欲瓜皮汎釣臺(경욕과피범조대) 작은 배로 낚시터 바위 주위를 떠돌까 하노라

百事思量身已老(백사사량신이노) 온갖 일 곰곰 생각해 보아도 몸은 이미 늙었고

短檠依舊照書堆(단경의구조서퇴) 짧은 자루 등잔만 예전대로 책더미를 비추네

 

타맥행(打麥行 : 보리타작 노래)

新芻濁酒如潼白(신추탁주여동백) 새로 걸러낸 막걸리 빛처럼 뿌옇고

大碗麥飯高一尺(대완맥반고일척) 큰 사발에 보리밥의 높이가 한 자로다

飯罷取枷登場立(반파취가등장립) 밥을 먹자 도리깨를 잡고 마당에 나서니

雙肩漆澤飜日赤(쌍견칠택번일적) 검게 그을린 두 어깨가 햇볕을 받아 번쩍이는구나

呼邪作聲擧趾齊(호사작성거지제) 소리를 내며 발맞추어 두드리니

須臾麥穗都狼藉(수유맥수도랑자) 순식간에 보리 낱알들이 마당 안에 가득하네

雜歌互答聲轉高(잡가호답성전고) 주고받는 노랫가락이 점점 높아지고

但見屋角紛飛麥(단견옥각분비맥) 단지 보이는 것이 지붕 위에 보리 티끌뿐이로다

觀其氣色樂莫樂(관기기색낙막락) 그 기색을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어

了不以心爲刑役(요불이심위형역) 마음이 몸의 노예가 되지 않았네

樂園樂郊不遠有(낙원낙교불원유)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데

何苦去作風塵客(하고거작풍진객) 무엇하려고 벼슬길에서 헤매고 있으리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 ~ 1836)은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는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이며, 가톨릭 세례명 요한. 시호 문도(文度)이며,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承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 帛書事件 :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당시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고자 했던 청원서로 인해 대역죄인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 되었다.

 

그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사후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