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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여류시인 남정일헌 제석유감(女流詩人 南貞一軒 除夕有感)

매년 섣달그믐(除夕)에 울리는 서울 종로 보신각(普信閣)에서의 타종은 각 사찰에서 중생들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 108번의 타종을 하던 불교식 행사에서 유래했다.

 

과거 조선정부가 태양력을 채택하고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삼기 전에는 음력 섣달그믐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설 하루 전으로 보통 1월 말에서 2월 중순에 해당됨으로 봄이 오는 길목에서 제야(除夜)와 신년(新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동양에서 사용한 음력은 달을 기준으로 하여 만든 것으로 달이 지구를 도는 시간은 대략 29.5일이다. 이를 1년으로 계산하면 약 354일이 걸리며 양력은 태양을 기준으로 지구의 공전주기에 맞춰 한 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기준 365일로 계산하기에 1년에 약 11일이 차이가 난다.

 

음력을 기준으로 농사짓기에 오차가 발생함으로 이를 보정하여 년 약 11일을 양력과 일치시키기 위해 보름단위로 절기를 두는 것을 24 절기라 하며 오차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3년마다 윤달(閏月)을, 4년마다 윤년(閏年)을 두었으며 윤년이 든 해는 2월은 29일이 된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은 단어인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제석(除夕)이 일주일이 체 남지 않았다.

 

약 백여 년 전 여류시인으로 한 많은 시대를 살고 간 남정일헌(南貞一軒)의 시 제석유감(除夕有感)에서는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밤의 정경과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제야(除夜)의 감회를 담아내고 있기에 이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제석유감(除夕有感 : 한 해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감회에 젖어)

忽忽怱怱漏箭催(홀홀총총루전최) 홀홀히 바쁘게 재촉하는 빠른 세월은

下爲能去不能回(하위능거불능회) 어찌하여 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安身經雪庭前竹(안신경설정전죽) 뜰 앞의 대나무는 가벼운 눈 속에 편안히 섰고

有意迎春窓下梅(유의영춘창하매) 창 아래 매화는 봄맞이할 뜻이 있다네.

陰沍已從今夜盡(음호이종금야진) 어둡고 닫힌 겨울은 오늘밤으로 다하고

陽喧復逐新年來(양훤부축신년래) 찬란한 햇빛 좇아 다시 새해가 온다네.

可憐守歲燈心苦(가린수세등심고) 묵은해를 지키고자 가엾은 등불의 마음은 괴로워

的的明心寸寸灰(적적명심촌촌회) 밝고 환한 심지는 마디마디 태워서 재가 되었네.

 

남정일헌(南貞一軒, 1840~1922)은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의 7대손으로 남세원(南世元)의 딸이며, 성대호(成大鎬, 1839~1859)의 부인이다. 세 살 때 훈민정음을 통달하니 아버지가 그 재예(才藝)를 사랑하여 날마다 글 수십 자를 벽에 걸어놓고 가르쳤는데 한 번만 보면 다 외웠으며 경사(經史)에도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사 일에도 능하여 만들기 가장 어려운 조복(朝服)도 한 번 보고는 능히 지어냈다고 한다.

 

16세에 성대호와 결혼하였으나 20세에 남편이 죽자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집안사람들이 항상 잘 살폈다. 그러던 중 야심한 밤에 정일헌이 자결하려는 것을 시어머니가 보고 옛날 효부지사(孝婦之事)를 들어 말리므로 마침내 그 가르침에 감화되어 온전함을 얻었다. 이때부터 집안일을 다스린 후 남는 시간에 책을 보는 것으로 자오(自娛)하였으며, 그 헌(軒)을 정일(貞一)이라고 했다. 83세에 예산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아산군 농은리에 장사 지냈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주어진 임무는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며 바느질하고 옷감을 짜는 것 외에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이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도는 자연히 남아선호사상을 내면화하였으며, 이런 분위기에서 결혼한 여성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칠거지악의 한 조항이 될 정도로 중죄에 해당했다. 그래서 간혹 아들이 없어 가계 계승이 어려워지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는 것이 당대의 실정이었다. 여성 한시 작가 중 남정일헌은 남편이 일찍 죽어 후손을 보지 못했으며, 그는 당대 관습에 따라 양자를 데려다 키운 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