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상은 늘 고민과 근심, 걱정의 쳇바퀴를 돌려가며 그 바퀴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몇 년 전 사찰에서 IT관련 프로젝트 수행 중 고명한 스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대화가 통했는지 스님께서 처사는 불법(佛法)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갑자기 질문을 하기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아니겠습니까?라는 즉답에 대화상대를 만났다며 스님 손에 이끌려 선방(禪房)에서 차담(茶啖)을 대접받은 적이 있다.
사찰을 찾아오는 중생은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받아 기복(祈福)적인 요소와 일상의 괴로움을 벗어나 보고자 함인데 이곳에서 청정적요(淸淨寂寥)의 실상(實相)을 얻은 과객(過客)이 새소리에 쫓겨가지 않도록 향기롭고 맑을 도량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에 그 스님은 환한 미소를 머금었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인생은 고진감래(苦盡甘來)보다 감진고래(甘盡苦來), 고래고래(苦來苦來)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마음속에 괴로움, 근심걱정의 무거운 짐을 서로 지고자 경쟁을 하고 있다. 마치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쥐고 뜨겁다고 하는 것과 같다. 뜨거운 감자를 놓으면 되는 간단한 이치를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근심걱정은 미리 할 필요가 없다.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된다.
지금 내가 여기 있는 현실이 실상이며 오늘이 즐거워야 내일이 즐겁듯이 스스로의 근심을 달래보고자 1,200여 년 전에 지은 당(唐)시인 나은(羅隱) 시 2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견(自遣 : 스스로 근심을 달래다)
得即高歌失即休(득즉고가실즉휴) 득의 하면 크게 노래하고 실의 하면 쉬면서
多愁多恨亦悠悠(다수다한역유유) 근심 많고 한 많은 이 세상 느긋하게 살다 가자
今朝有酒今朝醉(금조유주금조취) 오늘 아침 술 생기면 오늘 아침에 마셔 취하고
明日愁來明日愁(명일수래명일수) 내일의 근심일랑 내일 하면 그만인 것을
강남곡(江南曲)
江煙濕雨鮫綃軟(강연습우교초연) 강가의 안개와 비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漠漠遠山眉黛淺(막막원산미대천) 아스라한 먼 산은 눈썹 먹처럼 파릇하여라.
水國多愁又有情(수국다수우유정) 수국에는 근심도 많고 인정도 많아
夜槽壓酒銀船滿(야조압주은선만) 밤이면 동이에 술 걸러 은빛 배에 가득 싣는다.
細絲採怨凝曉空(세사채원응효공) 가는 현의 구슬픈 소리 새벽하늘에 엉기면
吳王臺榭春夢中(오왕대사춘몽중) 봄을 맞은 오왕의 누대는 꿈나라로 들어간다.
鴛鴦鸂鶒喚不起(원앙계칙환부기) 원앙과 뜸부기는 소리쳐도 날아오르지 않고
平鋪綠水眠東風(평포녹수면동풍) 잔잔한 푸른 물은 봄바람 속에 잠들어 있어라.
西陵路邊月悄悄(서능노변월초초) 서릉 가는 길가에 달빛은 고요한데
油壁輕車嫁蘇小(유벽경거가소소) 가벼운 *유벽거 타고 *소소소가 시집간다.
*유벽거(油壁車 : 수레 벽에 기름을 칠해 장식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옛날 여자들이 타는 수레)
*소소소(蘇小小 : 남제(南齊) 때의 천당(錢塘 : 항주)의 이름난 창기(倡妓)이다.)
강남곡 시는 나은(羅隱)이 강남지역의 아름다움과 어울려 시인의 독특한 내면적 감정을 섬세하게 잘 묘사했으며, 양쯔강 이남의 비 내리는 풍경과 섬세한 자연경관을 예술적 개념으로 표현함으로써 강남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리움이 시 속에 스며있다.
나은(羅隱, 833 ~ 910)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 : 당나라와 송나라 사이의 시기라는 점으로 인해 당말송초(唐末宋初), 당송교체기(唐宋交替期)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기를 살았던 시인이다. 자(字)는 소간(昭諫)으로 여항(餘杭) 또는 신증(新登) 사람이라고도 한다. 본명은 횡(橫)이다.
20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했으나 열 번이나 낙방하고, 마침내 이름을 은(隱)으로 고친 뒤 스스로 호를 강동생(江東生)이라 하였다.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순박하게 생겼지만 천박했다.(貌古而陋), '촌스러운 말씨가 어그러졌다.(鄕音乖刺)’,'재주를 믿고 사람들을 깔보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꺼리고 싫어했다.(恃才忽睨. 衆頗憎忌)'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관료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함통(咸通 : 860 ~ 874. 14년 동안 사용한 당나라(唐) 의종(懿宗) 이최(李漼)의 연호이다.) 11년(870년)에 호남(湖南)과 회주(淮州), 윤주(潤州) 등지를 돌며 관직을 얻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한 채, 광계(光啟) 3년(887년)에 강동으로 돌아온 뒤로는 곤궁하고 빈한한 생활을 하다가 55세 때에야 전류(錢鏐)의 막료(幕僚)가 되었고, 거듭 전당령(錢塘令), 진해군장서기(鎭海軍掌書記) 절도판관(節度判官)에 염철발운부사(鹽鐵發運副使) 저작좌랑(著作佐郎)을 거쳐 사훈랑(司勳郎)이 되었다.
관직을 얻은 뒤에도 오만방자한 성격은 끝내 고치지 못했지만 전류(傳流)는 거슬려하지 않았다고 하며, 나은도 주전충(朱全忠)의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발탁되었지만 나은은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소위(羅紹威)가 후량(後梁)에 귀부(歸附)한 뒤, 나은을 적극 추천하여 그를 후량의 급사중(給事中)으로 삼았고, 이때 주군인 전류도 이미 주온(朱温)에게 신하를 칭하고 있었기에 나은도 할 수 없이 받았다고 한다. 얼마 안 가서 전당(钱塘)에서 향년 77세로 숨을 거둔다. 세상에서는 그를 나 급사(羅給事)라 불렀다고 한다.
저서로 강동갑을집(江東甲乙集), 회남우언(淮南寓言)과 참서(讖書), 후집(後集)이 세상에 유행했으며, 아들 새옹(塞翁)이 있었는데 양의 그림을 잘 그렸고 그 그림은 후에 북송의 손면(孫沔)이 소장하게 되었다.
나은의 시는 영사(詠史), 즉 역사를 읊은 것이 많았는데, 당재자전(唐才子傳)에는 나은의 글을 평해 '시문(詩文)은 무릇 풍자하고 비꼬는 것을 주로 삼아 오래된 사당의 목상이라 해도 피해 갈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으며, 그 시풍(詩風)은 만당(晚唐)의 한 파에 속했고, 민간에 나도는 구어(口語)를 다듬는 데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신라의 문인으로서 당으로 유학하러 온 최치원(崔致遠)과도 교류가 두터웠는데, 《삼국사기》는 처음 최치원이 당으로 왔을 때, 평소 자신의 재주를 믿고 스스로 높게 여기며 쉽게 남을 인정하지 않았던 나은도 최치원에게는 자신이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조선의 정조(正祖)는 나은에 대해 "양동서(兩同書) 10편은 내용 중에 지론(旨論)이 많다. 그가 말한 귀천(貴賤), 강약(强弱), 손익(損益), 경만(敬慢), 후박(厚薄), 이란(理亂), 득실(得失) 등 여러 편에서 천고의 인물을 품평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읽어도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게 한다."라고 호평하면서도, "앞의 다섯 편에서 노담(老聃 : 또는 노자(老子)로 기원전 6세기 경 중국 고대의 철학자이며 도가(道家)의 창시자로,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생몰연대가 불분명한 인물이나, 사마천의 사기 중 노자열전에 따르면 춘추시대 초나라의 고현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을 끌어다 결론을 맺고 뒤의 다섯 편에서 공자를 끌어다 결론을 맺은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라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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