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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김삿갓 난고평생(김병연(金炳淵) 蘭皐平生)

조석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사뭇 다르다. 유난히 길고 무더웠던 여름 탓인지 맞이하는 초가을이 무척 반갑다. 밤 창가에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전령사(傳令使) 답게 가을이 왔음을 우렁차게 알리고 있다.

8년 전 소개한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은 도연명(陶淵明)의 자전(自傳)이다.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으면서 읽어가면 결국 도연명의 자서전(自敍傳)이라고 생각되는 약 170자 정도의 명문장으로 이해되고 있다.

중국에 오류선생전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김삿갓의 난고평생(蘭皐平生)이 있다.

난고(蘭皐)는 김삿갓의 아호이다. 난고평생(蘭皐平生) 시는 김삿갓 자서전(自敍傳)과도 같은 일대기로 1863년 경 57세의 일기로 임종 직전에 전라남도 화순 창원 정 씨의 사랑채에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앞서 수회 소개한 바 있는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 1807~1863)은 조선 시대 후기의 풍자 시인이자 방랑 시인이다. 그는 흔히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성심(性深), 호(號)는 이명(怡溟), 지상(芝祥), 난고(蘭皐)이다. 그의 선대 조상을 살펴보면 9대조부는 병자호란 때 척화대신(斥和大臣 :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대표적인 척화대신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을 이름)의 사촌형으로서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낸 김상준(金尙寯)이며 5대조는 황해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시태(金時泰), 고조부는 전의현감(全義縣監) 김관행(金觀行), 증조부는 경원부사(慶原府使) 김이환(金履煥)이다.

 

그가 태어난 지 4년째 되는 1811년 일어난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 : 1811년 평안북도에서 홍경래가 지방 차별과 조정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농민 항쟁)’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를 지낸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 1764년 - 1812년)이 홍경래(洪景來)에게 항복한 것이 문제가 되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당시 그는 하인의 도움을 받아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몸을 피해 숨어 살다가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했다.

그런데 김익순의 행동을 비판한 내용으로 과거에 급제한 후 뒤늦게 그가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벼슬을 버린 채 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특히 그는 당시 세도정치 아래에서 부패할 대로 부패한 권력과 자신의 배 불리기에 급급한 부자들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시(詩)를 많이 지었는데, 이로 인해 민중시인(民衆詩人)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의 호 ‘난고(蘭皐)’는 풀이하자면 ‘난초 언덕’ 혹은 ‘난초 향기 가득한 언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평생 세상의 명예와 이욕을 피해 다니며 삿갓 하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전국을 떠돌았지만 선비의 고고한 기상과 기품만은 잊지 않으려고 했던 그의 뜻과 의지를 읽을 수 있는 호라고 하겠다. 그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계절의 문턱에서 깊어가는 가을밤 술 한잔에 유행가 ‘방랑시인 김삿갓’의 노래를 들으며 238자의 난고평생 시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난고평생(蘭皐平生)

鳥巢獸穴皆有居(조소수혈개유거) 날짐승도 길짐승도 모두 제 집이 있건만

顧我平生獨自傷(고아평생독자상) 돌아보니 한평생 혼자 슬프게 살아왔다.

芒鞋竹杖路千里(망혜죽장로천리) 짚신 신고 지팡이 끌고 천리 길을 떠돌며

水性雲心家四方(수성운심가사방)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尤人不可怨天難(우인불가원천난)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이 못 되니

歲暮悲懷餘寸腸(세모비회여촌장) 해마다 세모에 혼자 가슴 아파하였다.

初年自謂得樂地(초년자위득락지) 어려서는 이 몸도 넉넉한 집에 태어나

漢北知吾生長鄕(한북지오생장향) 강남의 떵떵거리는 곳에서 자랐고

 

簪纓先世富貴人(잠영선세부귀인) 조상들도 부귀영화를 누려왔고

花柳長安名勝庄(화류장안명승장) 장안에서도 이름 높은 가문이었다.

隣人也賀弄璋慶(인인야하농장경) 이웃 사람들이 아들 낳았다고 축하해 주고

早晩前期冠蓋場(조만전기관개장) 언젠가는 출세하리라 기대마저 컸었건만

髮毛稍長命漸奇(발모초장명점기) 세월이 흐르면서 운명은 자꾸 기구해지고

灰劫殘門飜海桑(회겁잔문번해상) 마침내 상전이 벽해처럼 변하였다.

依無親戚世情薄(의무친척세정박) 세상에 의지할 친척 없고 인심마저 각박한데

哭盡爺孃家事荒(곡진야양가사황) 부모마저 세상을 떠 집안이 망하였다.

 

終南曉鍾一納履(종남효종일납리) 새벽에 남산 종소리 들으며 방랑 길에 오르니

風土東邦心細量(풍토동방심세양) 생소한 객지라서 마음마저 애달프다.

心猶異域首丘狐(심유이역수구호) 마음은 고향 그리는 떠돌이 여우와 같고

勢亦窮途觸藩羊(세역궁도촉번양) 신세마저 궁지에 몰린 양과 같구나

 

南州從古過客多(남주종고과객다) 남쪽지방은 자고로 과객이 많다 하지만

轉蓬浮萍經幾霜(전봉부평경기상)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기 몇 해였던가

搖頭行勢豈本習(요두행세기본습) 머리 굽혀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일까마는

闋口圖生惟所長(결구도생유소장) 목구멍에 풀칠하자니 어쩔 수가 없구나

光陰漸向此中失(광음점향차중실) 그런 중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흘러

三角靑山何渺茫(삼각청산하묘망) 삼각산 푸른 모습 어찌 그리 아득할까

江山乞號慣千門(강산걸호관천문) 떠돌며 구걸한 집 수없이 많았지만

風月行裝空一囊(풍월행장공일낭) 풍월을 읊는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

 

千金之子萬石君(천금지자만석군) 큰 부자 작은 부자 두루 찾아다니며

厚薄家風均試嘗(후박가풍균시상) 후하고 박한 집 모두 거쳐보았지만

身窮每遇俗眼白(신궁매우속안백) 팔자가 기구하여 남의 눈총만 받다 보니

歲去偏傷鬢髮蒼(세거편상빈발창)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歸兮亦難佇亦難(귀혜역난저역난) 돌아가기는커녕 머물기마저 어려워

幾日彷徨中路傍(기일방황중로방) 몇 날이나 더 길가에서 방황하여야 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