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관악산 가을단풍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하루가 다르게 붉게 변해가는 산색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을의 정점이 지나가는 아쉬움에 지난 주말 관악산에 올랐다. 험난 구간이기에 동반자 없이 자 나만이 즐겨 찾는 명 코스이기도 하다.

관악산은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자태를 뽐내고자 나를 강하게 불러들임에 주저함 없이 나선 산행은 눈으로 보아 색을 이루는 관악산의 풍경은 언제나 새롭게 느껴진다.

차량으로 20여분 정도면 쉽게 찾을 수 있고 명산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관악산은 앞서 여러 번 소개하였기에 금번 촬영한 영상과 옥담 이흥희(玉潭 李應禧 )의 상관악산영주대(上冠岳山靈珠䑓 )와 백호 윤휴(白湖 尹鑴)의 관악추망(冠岳秋望) 시를 자서와 함께 올려보았다.

 

관악산 가을단풍

 

상관악산영주대(上冠岳山靈珠䑓 : 관악산 영주대(연주암)에 올라)   - 이응희(李應禧)

攀巖捫壁陟崔嵬(반암문벽척최외) 바위 벼랑 부여잡고 가파른 봉우리 올라

來上靈珠上上臺(래상영주상상대) 높고 높은 이 영주대에 올라왔네

想得去天應不遠(상득거천응부원) 생각건대 여기서 하늘이 멀지 않으리 

仰看頭上有三台(앙간두상유삼태) 우러러보니 머리 위에 *삼태성이 있으니 

*삼태성(三台星 :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으로 물을 담는 쪽을 바라보는 길게 비스듬히 늘어선 세 쌍의 별)

 

옥담 이응희(玉潭 李應禧 1579 ~1651)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수(子綏), 호는 옥담(玉潭)이다. 부친은 여흥령(驪興令) 이현(李玹)이고 모친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14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2년 후인 1594년(선조 27)에 조모상까지 당했다. 이후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업을 이어가며 학문과 예절에 정열을 다 쏟아 원근에서 그 덕망을 칭송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자 꾀할 때 크게 상심하여 백의항소(白衣抗訴)로 간곡히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기도 과천 수리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학식이 고명함을 알고 중용하려 했으나 거듭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선조인 안양군(安陽君)이 연산군 때 원사(寃死 : 원통하게 죽음)를 당하면서 유언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말라고 하여 그 유훈을 따른 것이라 한다.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는데 7형제가 모두 진사에 급제하였는데, 모두 두(斗)자 항렬이라 주위에서는 칠두문장가(七斗文章家)라고 칭송하였다. 생전에 저술이 많았는데, 병자호란 때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저서로는 『옥담유고(玉潭遺稿)』, 『옥담사집(玉潭私集)』 등이 있다. 고향에서 류순인(柳純仁)‧심부(沈溥)‧류우인(柳友仁)‧안홍제(安弘濟)‧송규(宋珪)‧이원득(李元得)‧이경일(李敬一)‧한덕급(韓德及)‧안중행(安重行) 등과 함께 시계(詩契)인 향로계(享老契)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묘는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 195번지에 있었는데, 1993년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상기리로 이장하였다.

 

관악추망(冠岳秋望 : 관악산에서 가을에 바라보다)   - 윤휴(尹鑴)

牢落秋將晩(뢰락추장만) 덧없는 세월 가을 깊어 가는데 

蕭疎歲共遒(소소세공주) 쓸쓸하게 올해도 함께 저무네

登臨但一氣(등임단일기) 올라서는 원기만 느끼면 되지

不復辨皇州(부복변황주) 서울이 어디인지 따져 무엇하리

 

백호 윤휴(白湖 尹鑴 1617 ~ 1680)는 조선 후기 성균관사업, 대사헌,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윤갱(尹鍞).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 이조참판 윤호(尹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희손(尹喜孫)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윤효전(尹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아버지의 임지인 경주부의 관사에서 만득자(晩得子)주 01)로 태어났으며, 6년 위의 서형(庶兄) 윤영(尹鍈)이 있었다. 두 돌 못 미쳐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돌아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여주의 옛집으로, 두 차례의 정묘·병자호란 때에는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로 가서 피란하였다.

난 뒤에는 한 때 선영이 있는 공주 유천(柳川)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으나, 주로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장년에는 서울 쌍계동(雙溪洞)의 하헌에 거처를 잡고 여주를 자주 왕래하였다. 윤휴의 집안은 선비 가문으로서, 고조부인 윤자관(尹子寬)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다. 증조부는 성균관 생원으로 벼슬에 나가 이조참판에 이르고, 할아버지는 이중호(李仲虎)를 사사하였다.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인 민순(閔純)에게 수학하고, 1617년(광해군 9) 대사헌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부윤으로 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아버지의 계열인 소북이 자멸하자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입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은 1635년(인조 13) 19세 때에 이미 10년 연장자로 당대의 석학이던 송시열(宋時烈)과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송시열이 “30년 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라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權儁) 그리고 이유(李유)·장충함(張沖涵)·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 교분이 특별했으며, 서인 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 10) 43세 무렵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幽賤 : 세상에 드러나지 아니한 천한 사람) 시절부터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啓)·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 등 서인 계열의 명유들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민정중(閔鼎重)·유중(維重) 형제는 특히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1636년에 벼슬에 나갈 뜻으로 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바로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성하지맹(城下之盟 : 성 밑에서 적군과 맺는 맹약, 적과 맺는 굴욕적 맹약)이 맺어지자 신하로서의 부끄러움을 자책해 치욕을 씻을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다시 벼슬에 나갈 뜻을 가진 것은 38년 뒤인 1674년(현종 15) 7월로,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청(反淸) 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이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고 해 대의소(大義疏 : 큰 의리가 담긴 상소라는 의미지만 내용은 북벌(北伐)을 주창한 것)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마침 현종이 죽자 숙종이 즉위한 뒤인 이듬해 정월에 유일(遺逸)로서 정 4품 벼슬인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의 직을 받았다. 이후 5개월 만에 대사헌에 오르고, 이어서 판서직을 몇 차례 거쳐 1679년(숙종 5) 9월 우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경신환국(庚申換局 :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의 정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본래 당색(黨色)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으로 서인 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기해예송(己亥禮訟 : 1659년(현종 즉위) 5월, 효종의 국상에 계모 후였던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종류를 두고 일어났던 서인과 남인의 예설 분쟁) 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의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했으며,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 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남인으로서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해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淸南)을 이루었다.

재직 중의 업적으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고, 무과인 만과(萬科)를 설행하는 한편, 병거(兵車)주 02)와 화차(火車)의 개발을 고안해 보급하고자 한 것 등은 모두 평생의 신념이던 북벌을 실현시키려는 뜻에서였다. 그중에 군권(軍權)의 통합을 기한 도체찰사부의 설치는 서인 및 종척인 김석주(金錫胄) 등의 반발을 사서 경신환국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일생의 대부분을 포의(布衣 : 베옷.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입는 옷. 천하여 벼슬하지 않은 사람)로서 보내어 정치적인 면보다도 학문적인 업적이 더 많았다. 1638년 「사단칠정인심도심설(四端七情人心道心說)」을 지어 이기(理氣)·심성(心性)의 문제에 대해 일가견을 가졌다. 그 뒤 『중용』·『대학』·『효경』·『상서』·『주례』·『예기』·『춘추』 등 여러 경서들에 대한 자신의 분장(分章)·분구(分句)·해석을 가한 『독서기(讀書記)』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저술은 20대 유천 시절에 「홍범설(洪範說)」·「주례설(周禮說)」·「중용설(中庸說)」 등에서부터 시작해, 서울 하헌 시절에 「효경장구고이(孝經章句攷異)」·「대학설(大學說)」·「중용장구보록서(中庸章句補錄序)」·「중용대학후설(中庸大學後說)」 등을 지어 마무리한 일생의 역저로서, 조선의 유학사상으로도 매우 중요시되는 업적이다.

주자(朱子)가 성학(聖學) 발전에 최대의 공로를 세웠다고 높이 평가하는 한편, 후학들이 성학 발전에 기여하는 길은 주자가 일생 동안 학인(學人)의 자세로 일관해 새로운 업적을 이루었듯이 선유의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새로운 분장·분구 및 해석을 시도하였다.

윤휴의 이러한 학문 자세는 처음에는 당색을 초월해 칭양 받았으나, 나중에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사문난적(斯文亂賊 : 유교, 특히 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으로 규탄받았다.

이 밖에 「현종대왕행장(顯宗大王行狀)」·「가어주수설해(家語舟水說解)」·「어제주수도설후지(御製舟水圖說後識)」·「전례사의(典禮私儀)」·「제진공고직장도설(製進公孤職掌圖說)」·「만필(漫筆)」·「통제사이충무공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중간화담집서(重刊花潭集序)」 등의 글들이 중요시된다.

윤휴의 저술들은 문집 간행을 위해 윤하제(尹夏濟)·윤경제(尹景濟) 두 아들이 이미 정리했으나, 18세기 이후 정치적 적대 세력인 서인과 노론 계열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햇빛을 보지 못하고, 1927년에야 진주 용강서당(龍江書堂)에서 처음으로 『백호문집(白湖文集)』을 석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문집은 중요 저술인 『독서기(讀書記)』가 빠진 것을 비롯해 결함이 많았다. 그러다가 1974년에 직계손 윤용진(尹容鎭)이 비밀히 전해오던 원고들을 모두 망라해 『백호전서(白湖全書)』를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