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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새해 관련 한시 2수 : 맹호연 전가원일(孟浩然 田家元日), 유창 신년(劉敞 新年)

2024년 새해를 맞이한 지 5일이 되었다. 한 달이 지나면 입춘(立春)이다.

봄을 알리는 입춘은 24 절기(二十四節氣) 중 첫 번째다. 24 절기는 태양의 움직임(황도 : 黃道)에 따라, 1년을 24개로 나누어 정한 날들로 24개라는 개수와 명칭이다. 그리고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하여 태음력(太陰曆)의 단점을 보완한다는 발상은 중국의 화북지방(華北地方)에서 처음 고안되었다.

주로 농경사회였던 동아시아권은 일정하게 변하는 달의 모습을 보며 음력을 기준으로 삼았으나 태양을 기준으로 한 양력은 1년 365일이지만 달을 기준으로 한 음력은 354일이다. 1년에 약 11일 차 차이를 보완하기 위해 윤달이 존재하는데 이런 차이로 농사 짓는데 계절과 잘 맞지 않아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24절기이다.

우리나라의 24 절기는 조선시대 무렵부터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음력을 중심으로 사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24 절기는 음력이 아닌 양력과 잘 맞는다.

음력 기준인 다른 명절(설날, 추석, 단오, 복날 등)은 양력 날짜가 매년 바뀌는 반면 24 절기는 매년 동일한 날짜로 고정되었으며, 4년에 한 번 윤년의 영향을 받아 날짜가 바뀐다 해도 하루 정도만 뒤로 밀리는 것이 전부다.

 

지금은 양력을 기준으로 새해를 맞이하는데 우리나라 양력은 1895년 을미년에 고종이 태양력(그레고리력)을 사용하라는 조칙(詔勅 :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을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1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양력을 사용하여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서양의 과학과 수학에 뒤처진 결과일 것이다.

과거 새해 또는 새해 아침을 신년(新年), 원단(元旦), 원일(元日), 세두(歲頭)라 부르며 희망 가득 찬 한 해를 기원했을 것이다.

예와 다름없이 우리 또한 새해를 맞이하여 새 희망과 함께 건강을 기원하고 소원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다. 이런 의미에서 새해 관련 한시 2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가원일(田家元日 : 농가의 설날) / 맹호연(孟浩然)

昨夜斗回北(작야두회배) 어제저녁 북두성이 북쪽에서 돌더니

今朝歲起東(금조세기동) 오늘 아침은 새해가 동에서 뜬다.

我年已强仕(아년이강사) 내 나이는 이미 마흔인데

無祿尙憂農(무녹상우농) 관직도 없는데 오히려 농사일 걱정한다.

桑野就耕父(상야취경부) 뽕나무 들판에 농부는 밭갈이 나가고

荷鋤隨牧童(하서수목동) 나는 호미를 메고 목동 따라나선다.

田家占氣候(전가점기후) 시골에서 날씨를 점치더니

共說此年豐(공설차년풍) 모두가 올해는 풍년이라 말하네.

 

맹호연(孟浩然. 689 ~ 740)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자는 호연(浩然)이며, 샹양[(襄陽ㆍ湖北星)사람으로 절의(節義)를 존중, 녹문산(鹿門山)에 숨은 일도 있다. 40세 때 장안(長安)에 나가 시로써 이름을 알리고, 왕유(王維)ㆍ장구령(張九齡) 등과 사귀었다. 그의 시는 왕유의 시풍에 상사(相似 : 서로 비슷)하고, 도연명(陶淵明)의 영향이 크다. 성당(盛唐)의 대표적 시인으로서 왕유와 병칭(竝稱)되었다. 맹양양(孟襄陽)으로 불려지고 《맹호연집(孟湖然集)》 4권이 있다.

 

신년(新年 : 새해) / 유창(劉敞)

雪消冰解漏靑春(설소빙해누청춘) 눈 녹고 얼음 풀려 푸른 봄기운 스며 나니

醉眼驚看物物新(취안경간물물신) 취한 눈으로 바라보는 만물의 새로움에 놀라네.

已識年華似飛鳥(이식년화사비조) 꽃 피는 호시절 나르는 새 같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直將身世委天均(직장신세위천균) 오로지 이 신세를 하늘 이치에 맡겨두네

 

유창(劉敞 1019 ~ 1068)은 북송(北宋) 임강군(臨江軍) 신유(新喩) 사람으로 자는 원보(原父)고, 호는 공시(公是)다. 인종(仁宗) 경력(慶曆) 6년(1046) 진사가 되었다. 이부남조(吏部南曹)와 지제고(知制誥)를 지냈다.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갔는데, 산천지리(山川地理)를 모두 숙지하여 거란 사람들이 탄복했다. 양주지주(揚州知州)로 나갔다가 운주지주(鄆州知州) 겸 경동서로안무사(京東西路安撫使)로 옮겼다. 얼마 뒤 불려 경사(京師)의 형옥(刑獄)과 옥첩(玉牒)을 규찰하는 자리로 옮겼다.

인종에게 신하들이 올린 존호(尊號 :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기린다 하여 올리던 칭호)를 받지 말라고 간언 했다가 수흥지군(水興知軍)으로 쫓겨났고, 얼마 뒤 병으로 소환되었다. 다시 외직을 구해 판남경어사대(判南京御史臺)까지 지냈다. 박학하고 『춘추(春秋)』에 정통했는데, 전주(傳注)에 얽매이지 않았다. 한유(漢儒)의 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저서에 『칠경소전(七經小傳)』과 『춘추권형(春秋權衡)』, 『춘추전(春秋傳)』, 『춘추의림(春秋意林)』, 『춘추전설례(春秋傳說例)』, 『공시집(公是集)』 등이 있다. 동생 유반(劉攽), 아들 유봉세(劉奉世)와 함께 『한서표주(漢書標注)』를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