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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용아거둔 선사의 학빈(龍牙居遁 禪師의 學貧)

오늘날 청빈(淸貧)한 공직자가 드물다. 수시로 교체되는 신임장관들은 청문회를 거치기 마련인데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없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청빈한 공직자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청렴(淸廉)하면서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가난하게 된 것과는 달리, 청렴이 가난의 원인이 될 때만 그 가난을 청빈이라 하는데 불의와 타협할 유혹을 가장 많이 받는 공직자들에게 주로 해당된다. 덕과 능력이 있어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를 수 있는데도 그 자리에 앉는 것 자체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사양하거나, 그런 높은 지위에 있는 공직자가 불의와 타협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도 도덕적인 이유에서 타협을 거부하므로 가난하게 되는 사람을 청빈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 도(道)와 학(學)은 청빈으로 일관하여 이루기는 어렵다. 현실이 너무 궁핍할 경우 이상을 실현하기 어렵듯이 지나치게 가난하거나 풍족한 환경이라면 당연히 도(道)는 멀어지기 마련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는 거저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도(道)를 이루는 것 또한 가난함에서 비롯되듯이 가난을 먼저 배워야 도와 친하게 되고 도를 이루고 행함에 있어서도 청빈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당나라 승려 용아거둔(龍牙居遁) 선사(禪師)의 시는 호도(好道)와 호학(好學)에는 청빈함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 한번쯤 되새겨야 할 요소가 담겨 있기에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학빈(學貧 : 가난을 배우다)

學道先須且學貧(학도선수차학빈) 도를 배우려면 모름지기 가난부터 배울지니

學貧貧後道方親(학빈빈후도방친) 가난해지고 나면 비로소 도와 친해지도다

一朝體得成貧道(일조체득성빈도) 하루아침에 가난한 도를 체득해 이뤘을진대

道用還如貧底人(도용환여빈저인) 도를 사용함에 또한 가난할 때의 그 시절과 같도다.

 

용아선사(龍牙居遁禪師 835~923)는 당나라 유명한 승려이자 시인으로 속성은 곽(郭)씨이다.

세칭(世稱) 용아거둔선사(龍牙居遁禪師)로 불린다. 14살 때 길주(吉州, 江西) 만전사(滿田寺)에서 출가했다. 다시 숭악(嵩嶽)에게 수계(受戒)한 뒤 여러 지방을 유력(遊歷)했다. 처음에 취미무학(翠微無學)과 임제의현(臨濟義玄)을 참알(參謁)하고, 다시 덕산(德山)을 뵌 뒤 동산양개(洞山良价)를 찾아 그 법을 이었다. 그 후 호남마씨(湖南馬氏)의 초청을 받아 용아산(龍牙山) 묘제선원(妙濟禪苑) 주지를 지냈다. 증공대사(證空大師) 또는 용아선사(龍牙禪師)로 불렸다. 오대(五代) 후량(後梁) 용덕(龍德) 3년에 입적했으며, 세수(世壽) 89세다.

 

안빈낙도(安貧樂道)는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 안회(顔回 :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현인(賢人)으로, 자는 자연(子淵)이다. 자(字)를 따서 안연(顔淵)·안자연(顔子淵)이라고도 부른다)를 통해 전해진 도덕적 개념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는 유가 사상의 중요한 요소로, 옛 선비들의 생활신조를 대표하는 말로 여겨집니다. 안빈낙도의 핵심은 가난한 상황에서도 편안함을 느끼며 도(道)를 즐기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속세를 떠나 산수에 머무르는 은사(隱士)의 처세나 청빈하고 맑은 기풍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가난을 개의치 않고 성인의 도를 좇아 즐겁게 사는 삶을 추구한다면 확실히 범인(凡人)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공자(孔子)가 총애(寵愛)했던 제자 안회(顔回)는 어찌나 열심히 학문을 익혔는지 나이 스물아홉에 벌써 백발(白髮)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덕행(德行)이 뛰어나 공자(孔子)도 그로부터 배울 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너무 가난하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일생 동안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했고, 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하지만 그런 외부의 환경을 탓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주어진 환경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성인(聖人)의 도(道)를 추구하는데 열심이었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고 누추하기 그지없는 뒷골목에 살면서도 아무런 불평이 없구나. 가난을 예사로 여기면서도 여전히 성인(聖人)의 도 좇기를 즐거워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장한가."

그러나 그런 안회(顔回)였지만 서른한 살에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공자(孔子)가 그를 높이 평가한 까닭은 그의 호학(好學)과 안빈낙도의 생활 자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