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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세모(歲暮)관련 한시 3수(이산해 수세, 사청 응조부득제야, 사영운 세모)

새해 시작이 어제 같은데 벌써 올해의 마지막 한 주를 맞이하게 되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어찌 막을 수는 없지만 며칠 후면 제석(除夕)날이다. 옛사람들은 섣달그믐은 음력 12월의 마지막 날로, 음력 12월 30일 또는 음력 12월 29일로 이를 제야(除夜), 제석(除夕), 제일(除日)이라 부르며 한 해의 마지막 날을 기리고자 했을 것이다.
곧 31일 밤 12시에 울려 퍼지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쉬움과 부족함이 넘치는 한 해를 보내며 반성과 함께 새해 희망을 기원해 본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에 세모(歲暮) 관련 한시 3수를 살펴보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其一. 수세(守歲 : 세월을 지키면서) /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舊歲今從何處去(구세금종하처거) 묵은해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新年似向此中期(신년사향차중기) 이쯤에서 새해를 기약해야겠구나.
流光衰衰非關我(유광쇠쇠비관아) 흘러가는 세월 나와 무관하다 하지만
最是生憎入鬢髭(최시생증입빈자) 하얀 귀밑머리로 돌아오니 가장 밉구나.
 
수세(守歲)는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 세시풍속으로 해 지킴이라고 한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송구영신(送舊迎新)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옛 풍속의 하나이다.
이날 밤에 각 가정에서는 방·마루·부엌·곳간·뒷간·장독대 등 집안의 곳곳에 불을 밝혀놓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특히, 부뚜막 솥 뒤에 불을 밝히는 것은 이날에 부엌귀신인 조왕(竈王)이 하늘에 올라가서 천신(天神)에게 그 집에서 일년 동안 있었던 일을 낱낱이 보고한다고 믿고 조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어린아이들은 잠을 자지 않으려고 옛날이야기책을 읽거나 윷놀이와 같은 놀이를 하면서 졸음을 쫓으려 애를 썼는데, 그것은 이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결국 잠이 들게 마련인데, 그런 경우에는 일찍 잠을 잔 아이의 눈썹에 흰 분가루를 발라주고 이튿날 아침에 눈썹이 세었다고 놀려주는 일도 있었다.
한편, 중국의 촉(蜀)나라 풍속에 섣달 그믐날에는 잔치를 베풀어 많은 벗을 청하고, 밤에 불을 밝히고 밤새움을 하는 수세의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섣달 그믐밤의 수세풍속은 중국 세시풍속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하겠다.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9 ~ 1609)는 조선 의정부(議政府) 영의정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 시인이며 성리학자, 교육자, 화가이다. 당적(黨籍)은 동인, 북인에 속했으며 당의 주요 수뇌부이자 전략가였다. 본관은 한산(漢山), 자(字)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죽피옹(竹皮翁)·시촌거사(枾村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李塏)의 종고손이 된다.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조선 명종 때부터 광해군 때까지 벼슬을 한 조선시대 학자,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거친 당대의 세도가이자 문장가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 : 중국 명나라의 백과사전 대명회전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된 것을 조선 조정 차원에서 수정하려 했던 일이다. 대명회전은 명나라의 국가에서 편찬하였고 중간중간 개정되고 새 황제 즉위시마다 새로 간행되었다. 명나라에서는 수정요청에 소극적이었고 선조 때에야 역관 홍순언의 의협심에 감명받은 명나라 예부상서 석성의 적극적인 건의로 수정된다. 선조는 이때 마지막 종계변무 사절 관련자들만을 정국공신과 정국원종공신으로 책록 하였다.)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서훈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장력을 인정받아 명종의 명을 받아서 경복궁 대액(大額)을 썼던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1588년 우의정에 올랐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무렵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으며, 1590년에는 광국공신 3등으로 책록 되어 아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기축옥사의 참혹함을 보고 서인에게 원한을 품고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 된다.
 
1591년 세자 책봉파문(建儲問題 : 1591년(선조 24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며, 건저의 사건(建儲議事件)이라고도 한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던 일을 뜻한다.)으로 실각한 정철과 서인의 처벌을 놓고 동인이 내부의 여론이 나뉘었을 때는 정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으며,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에는 북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1590년과 1591년, 1592년, 1599년과 1602년 세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화가 이산보(李山甫)의 사촌 형이며,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인 문신 겸 역술인 이지함은 그의 숙부이기도 했다.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문인이다.
 
其二. 응조부득제야(應詔賦得除夜 : 황명을 받아 제야를 읊다) / 사청(史青)

今歲今宵盡(금세금소진) 금년 오늘밤이 끝나고 나면
明年明日催(명년명일최) 내년 내일이 다가오리니
寒隨一夜去(한수일야거) 추위는 이 밤 따라 떠나가고
春逐五更來(춘축오경래) 봄날이 새벽 쫓아 도래하겠지
氣色空中改(기색공중개) 천지의 기운이 바뀌는 중에
容顔暗裏回(용안암리회) 얼굴 색도 은연중 돌아오겠지
風光人不覺(풍광인불교) 경치를 사람들이 알기도 전에
已入後園梅(이입후원매) 이미 뒤뜰 매화에 스며들었네
 
제목에서 보듯 이 시는 임금의 명령을 받아 지은 시, 이를 응제시(應製詩)라 부른다. 응제시는 황실의 공덕을 기리거나 제왕의 치적, 태평성대를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 봄기운이 매화꽃에 스미었다는 비유는 말하자면 백성들이 아직은 깨닫지 못하지만 황제의 바른 정치로 봄기운이 천지에 퍼질 것이라는 희망의 찬가인 셈이다. 이 시를 짓기 전 시인은 당 현종(玄宗)에게 상소를 올린다. 조조(曹操)의 아들 조식(曹植)은 일곱 걸음에 시 한 수(七步詩)를 지었다지만 자기는 다섯 걸음이면 된다고 스스로를 추천한 것이다. 현종 앞에 불려 와 즉석에서 지은 게 이 시다. 현종은 그의 재능을 크게 칭찬하며, 즉시 좌감내장군(左監內將軍)의 관직이 하사되었다.
 
사청(史青)은 당대(唐代) 시인으로 후난성(湖南省) 융저우시(永州市, 영주시)의 링링구(零陵区)출신이다. 매우 총명하고 강직한 사람으로 당 현종에게 스스로 상소를 올려 그의 재능을 인정받아 관리가 된 인물이다.
 
其三. 세모(歲暮 : 한 해를 보내며) / 사영운(謝靈運)

殷憂不能寐(은우불능매) 깊은 근심으로 잠 못 이루고
苦此夜難頹(고차야난퇴) 괴로운 이 밤새우기도 어렵네.
明月照積雪(명월조적설) 밝은 달빛은 쌓인 눈을 비추고
朔風勁且哀(삭풍경차애) 세찬 북풍이 또한 애달프다.
運往無淹物(운왕무엄물) 가는 세월에 머물러 있는 것 없이
年逝覺已催(년서각이최) 한 해를 보내니 삶의 촉박함을 깨닫네.
 
사영운(謝靈運, 385 ~ 433)은 중국 동진(東晉)·송대(宋代)의 시인으로 본적은 진군(陳郡, 허난성)이나, 진(晋)의 남도(南都) 후는 회계(會稽 : 저장성)로 본거를 옮긴 명문 출신이다. 조부 현(玄)은 비수의 전쟁(淝水之戰. 383)에서 대공을 세워 강락공(康樂公)에 책봉되었다. 부친 환은 일찍 죽었고, 젊어서 조부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사강락(謝康樂)이라고 칭해졌다.
명문 출신이었으므로 정치에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진이 멸망하고 송이 서자 작위(爵位)를 강등당한 후 중요한 관직에도 있지 못해서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불만의 배설구로서, 회계와 영가(永嘉 : 저장성)의 아름다운 산수에 마음을 두어 훌륭한 시를 남겼다. 결국 최후에는 모반의 죄를 쓰고 처형되었다. 그의 시는 종래의 노장류(老莊流)의 현언시(玄言詩)의 풍을 배제하고, 새로이 산수시의 길을 개척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어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 동시대의 도연명(陶淵明)의 자연시에 비해서, 인위적인 수사(修辭)의 아름다움에 기울어졌다는 결점이 있으나 당시 사영운의 위치는 어디까지나 정통적이었으며, 문선(文選)에 40수가 수록되어 있다.
 

(한 해의 끝자락 붉은 태양이 서산에 지며 낙조를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