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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눈(雪) 관련 한시 2수 : 정렴 검단사 설경(鄭磏 黔丹寺 雪景), 이식 효설우음(李植 曉雪偶吟)

지난 12월 30일 서울에 종일 눈이 내렸다. 42년 만에 내린 최신심적설(最新深積雪 : 새로 내려 쌓여 있는 눈의 깊이)이라고 한다. 새벽부터 내린 눈은 삽시간에 대지를 하얗게 변화시켰기에 오후 들어 집에서 가까이 있는 대모산을 올랐다. 앞서간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 따라 오르며 적설풍경을 사진으로 몇 장 담아보았는데 펑펑 쏟아지는 눈 구경의 정취는 나이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어젯밤 세종으로 내려와 전에 찍어둔 설경 사진을 살펴보다가 눈 관련 북창(北窓) 선생의 검단사 설경(黔丹寺 雪景)과 택당(澤堂) 선생의 효설우음(曉雪偶吟) 시 한 수를 자서해 보았다.

두 시를 조용히 음미해 보면 눈 내린 풍경을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 하는 듯한 묘한 여운이 깃든 시다.

 

*검단사 설경(黔丹寺 雪景) / 정 렴(鄭 磏)

山徑無人鳥不回(산경무인조불회) 산 길에는 인적 없고 새도 돌아오지 않으니

孤村暗淡冷雲堆(고촌암담냉운퇴) 외딴 마을에 차가운 눈구름 짙게 쌓였네

遠(院)僧踏破琉璃界(원승답파유리계) 저 멀리 한 스님 흰 눈(*유리계) 밟고 가서

江上敲氷汲水來(강상고빙급수래) 강 위에서 얼음을 깨고 물 길어오네

 

*검단사(黔丹寺)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오두산(鰲頭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847년(신라 문성왕 9) 혜소(慧昭)가 창건하였다. 혜소는 얼굴색이 검어 흑두타(黑頭陀) 또는 검단(黔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찰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사찰이 있는 오두산이 검은 편이라 검단사(黔丹寺)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유리계(琉璃界)  : 유리로 된 아름다운 궁전이 있는 세계를 말하는데 이는 곧 극락을 말한다.

 

북창 정렴(北窓 鄭磏 1506 ~ 1549)은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조선 3대 기인(奇人)인 정렴의 본관은 온양(溫陽)이며, 자는 사결(士潔)이고, 호는 북창(北窓)이다. 좌의정 순붕(順鵬)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를 거쳐 관상감(觀象監)·혜민서(惠民署)의 교수를 역임하고 포천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아버지가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과 함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이고 귀양 보내자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였다.

그는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지리·의학·복서(卜筮)와 불교·도교에도 정통했고 그림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토정 이지함(李之菡)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기인으로 꼽힌다. 이유원(李裕元)이 지은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4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에 의하면 "정렴은 신묘하게도 여러 나라의 언어를 이해하였다. 일찍이 중국에 갔을 때 유구국(琉球國) 사람이 그를 찾아와 주역(周易)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그는 즉시 유구국의 말로 가르쳐 주었다. 관(館)에 있던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서 찾아오자 각기 그 나라의 언어로써 대화를 나누니, 그를 천인(天人)이라고 칭찬하면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하여 여러 나라 언어에도 능통했음을 알 수 있다. 저서에 북창비결(北窓秘訣), 용호비결(龍虎泌訣) 등이 있고, 문집인 북창집(北窓集)이 전한다.

 

효설우음(曉雪偶吟 : 눈 내리는 새벽에 우연히 읊다) / 이식(李植)

凍水鳴何細(동수명하세) 얼음장 밑으로 쫄쫄 물이 흐르는

深宵靜不風(심소정불풍)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이 밤

忽聞山木響(홀문산목향) 툭툭 가지 꺾어지는 소리 들려와

知是雪花濛(지시설화몽) 눈이 펑펑 내린 것을 알 수 있었네

卷幔窓全白(권만창전백) 휘장을 걷고 보니 창 밖이 환한데

開爐火失紅(개노화실홍) 화롯불을 뒤척여도 불씨를 살릴 수 없네

會看晴旭動(회간청욱동) 날이 개고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千嶂玉朧朧(천장옥롱롱) 천산의 산봉우리 희뿌연 옥 빛으로 변해 있으리.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 ~ 1647)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 택풍당(澤風堂) · 남궁외사(南宮外史) · 택구거사(澤癯居士),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좌의정을 지냈던 이행(李荇)의 현손(玄孫)이며, 부친은 이안성(李安性), 모친은 무송윤씨(茂松尹氏) 윤옥(尹玉)의 딸이다.

161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 설서(說書)는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소속된 정 7품 관직)를 거쳐 북평사 · 선전관을 지냈으나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때 택풍당(澤風堂)이라는 당호(堂號)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주위에서 택당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호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지평으로 재기용되었고 대사간 · 대사헌 · 형조판서 · 예조판서 · 이조판서 등 요직에 올랐다.

당대의 문장가로 불려 상당한 양의 저작을 남겼으며, 특히 한문학에 정통하여 신흠(申欽) · 이정구(李廷龜) · 장유(張維)와 더불어 조선 4대 문장가로 병칭 되었다. 현전(現傳)하는 필적을 통해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는데 행서작품이 주를 이룬다. 1625년에 쓴 <송박학사대관좌임함평(送朴學士大觀左任咸平)>은 행서작품이나 빠른 속도로 글씨를 쓸 때 글자와 글자 사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형태의 이른바 '유사(遊絲)'의 처리가 절제되어 해서(楷書)와 같은 단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필(起筆)시 원필세(圓筆勢 : 붓이 움직이는 기세로 藏鋒(장봉)의 형태로 글자를 둥글게 표현)를 취하고 비백(飛白 : 흰 비단이 바람에 희끗희끗 나부끼듯 생동하는 필세를 형용한 필획의 현상)의 필력을 보이면서도 진중함을 드러내고 있다.

 

(대모산 설경)

 

 

 

 

 

 

 

 

 

대모산 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