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해동서성 김생(海東書聖 金生)

몇 일전 예술의전당 서예관에 전시중인 제27회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전시작품을 둘러보았는데 갈수록 퇴보해 가는 한국서단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고 돌아온 적이 있다. 글은 나이 들어 갖추어 진다는 인서구노(人書俱老) 격언처럼 작품을 낸다는 것은 젊어서부터 갈고 닦아 중년을 넘어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갖추고 한학에 대한 일정 이상 소양을 지닌 출품자들이 여야 하는데, 과연 몇 이나 될까 하는 의구심을 차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나름 심사를 위한 객관성을 유지하겠지만 갈수록 획일화, 계파화, 하향화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며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안타까운 현실이 암울하기만 하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우리나라 서예사를 살펴보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해동서성 김생이다. 비록 남아있는 진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비문에 새겨진 글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취는 남아있어 후학들로 하여금 감탄과 자긍심을 갖게 한다. 중국에서 조차 왕희지를 뛰어 넘는 해동의 서성으로 추앙받았던 김생(金生), 송설 조맹부(松雪 趙孟頫)를 앞섰던 안평대군(安平大君),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3분은 우리나라 서예 역사상 가장 뛰어난 3대 서예가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오늘날 서단(書團) 현실을 깊이 있게 진단해 보며 글에 입문하는 분이라면 먼저 김생에 대한 자취를 살펴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으리라.

해동서성 김생(海東書聖 金生. 711~ ? ) 통일신라시대 서예가로서 字는 지서(知瑞). 별명(別名)은 구(玖)이다.
『삼국사기』권48 열전 제8 에 의하면, (金生 父母微 不知其世系 生於景雲二年 自幼能書 平生不攻他藝 年踰八十 猶操筆不休 隸書行草皆入神 至今往往有眞蹟 學者傳寶之) : 김생(金生)은 부모가 한미(寒微 : 사람의 형편이 구차하고 신분이 변변하지 못함)하여 그 가문의 계보를 알 수 없다. 경운(景雲) 2년(聖德王 10년 711)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하여 평생토록 다른 기능은 공부하지 않았다.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오히려 붓을 잡고 쉬지 않았다. 예서(隸書),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씀에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지금(高麗)까지도 흔히 그의 친필이 있어 학자들이 서로 전하여 보배스럽게 여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洪灌)이 한림대조(翰林待詔)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폭을 내보이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하였다.”고 한다.

그의 행적 또한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충주목(忠州牧) 불우조(佛宇條) 김생사항(金生寺項)에 “김생이 두타행(頭陀行 : 번뇌를 끊고 의식주에 대한 탐심이 없이 깨끗하게 불법을 닦는 일)을 닦으며 이곳에 머물렀기에 金生寺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생의 글씨로 전해지는 작품들이 모두 사찰 또는 불교와 관련된 점으로 보아 ‘호불불취(好佛不娶: 부처를 좋아해 장가를 들지 않음)’하였다는 그의 생을 짐작할 뿐이다. 그는 특히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하여 해동제일(海東第一)의 서예가로 평가 받아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그를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그의 진적(眞蹟: 실제의 유적)이 귀해져 이광사(李匡師)의 원교서결(圓嶠書訣)에서 그의 진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할 정도였다. 김생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경복궁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이 비의 비문 글씨는 고려 광종 5년(954)에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행서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순류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운필(運筆: 붓 놀림)로 서가(書家)의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또한, 짜임새나 획의 처리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틀에 박힌 글씨에서 벗어나 운치를 살리고 있다. 그의 유일한 서첩으로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가 있으며, 『해동명적(海東名蹟)』·『대동서법(大東書法)』에 몇 점이 실려 있다. 특히,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는 자유분방하면서 힘이 넘치는 필적이다.

이 밖에 「창림사비(昌林寺碑)」가 있는데 현재 원비는 물론 탁본조차 전하지 않는다. 단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가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서 “창림사비는 신라김생의 글씨로 자획에 전형(典型)이 깊어 당인(唐人)의 명각(明刻: 뛰어난 조각가)이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품평이 전한다

우리나라 역대의 명서가(名書家)를 거론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 김생이다. 이는 김생의 필적이 지닌 예술적 가치와 함께 후대의 평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예사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생애나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다행히 고려 때 찬술된 김부식의 『삼국사기』 열전에 전기가 실려있어 생년 및 서예가로서의 명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711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으며 평생토록 다른 기예를 전공하지 않았다.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붓을 잡고 쉬지 않았는데, 예서(隸書)와 행초(行草)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지금도 가끔 그의 진적이 있어 학자들이 서로 전하여 보배로 여긴다.
숭녕(崇寧 : 중국 송나라의 제8대 황제인 휘종(徽宗)이 사용한 두 번째 연호(1102~1106년). 연간에 학사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 변경(汴京)에 묵고 있었는데, 당시 한림대조(翰林待詔)였던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숙소에 와서 글씨와 그림 족자를 구하였다. 홍관이 김생이 쓴 행초 한 권을 보여주자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 왕우군(王右軍 : 왕희지), 왕희지가 쓴 글씨를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하였다. 홍관이 말하기를 '그게 아니라 이는 신라사람 김생이 쓴 것이다' 하였으나,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천하에 왕우군을 빼놓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겠소' 하면서 홍관이 여러 번 말하여도 끝내 믿지 않았다."
전기의 내용은 김생이 평생 글씨만을 배우면서 80세를 넘게 살았고, 예서와 행초에서 뛰어난 경지를 이루었으며, 중국인들이 오인할 정도로 왕희지 행초 서풍을 핍진(逼眞 : 문학, 예술, 과학철학 등에서 진리에 가깝거나 흡사한 정도를 나타냄) 하게 구사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김생의 전기가 실린 뒤로부터 김생의 명성은 더욱 드높아져 마침내 우리나라 제일의 명서가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문인 이인로(李仁老)가 '신라사람 김생은 용필이 신과 같아 초서도 아닌 듯 행서도 아닌 듯 매우 신기로우니 멀리 57종의 제가체세(諸家體勢)로부터 나왔다', '신라인 김생은 필법이 기묘하니 위 · 진대 사람들이 발돋움하여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이다'라고 극찬한 것은 바로 김생이 옛 명서가들의 장점을 널리 취합하여 행초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는 뜻일 것이다.
또 고려 말의 이규보는 우리나라 역대의 명서가를 품평하면서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극찬했고, 조선 초의 서거정은 '우리나라 글씨를 논한다면 김생이 제일이며 학사 요극일(姚克一 : 신라말기의 서예가)과 스님 탄연(坦然) 영업이 그 다음인데, 모두 왕희지를 법으로 삼았다'고 추켜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후대 문헌에서도 지속되었는데, 이들 기록에서 김생은 중국 명서가들의 고사에 비유되면서 높은 찬상을 받았다. 이처럼 고려 · 조선의 문인들로부터 찬상을 받으면서 김생은 마침내 우리나라 서예의 비조(鼻祖) 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례로 조선후기의 유명한 서예가 이광사는 '우리나라 필법은 신라 김생을 종주로 여기는데, 오늘날 그의 진적으로 전하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탑본(搨本) 역시 기위(奇偉 : 뛰어나게 훌륭함)하고 법이 있어 고려시대 이후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며 극찬했던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김생의 뛰어난 자질과 꾸준한 노력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 남북국시대 신라 8세기라는 위대한 시대문화가 김생을 '동방의 서성(書聖)'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시기에는 미술문화 전반에 걸쳐 삼국시대 이래의 유산을 기반으로 당나라의 선진문화를 수용하여 이를 신라의 토양 속에서 완성시켰던 것이다. 경주 석굴암의 불교조각이라든지 성덕대왕신종과 같은 뛰어난 금속공예품 등이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진 미술품이다. 서예 방면에서도 삼국시대 이래의 서예를 바탕으로 구양순 · 저수량 등의 초당(初唐) 서풍을 널리 수용하고 왕희지 등의 고전적 행서풍(行草風)이 풍미하면서 뛰어난 명품들이 산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문화의 흐름 속에서 김생이 단연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당시 유행했던 중국풍의 글씨를 외형적으로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로운 짜임과 활달한 운필로써 자신만의 독창적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김생의 대표작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 낭공대사비>는 신라의 고승 낭공대사(郎空大師)의 행력을 적은 것으로 원래 경북 봉화군 하남면의 태자사(太子寺)에 세워졌으나, 언젠가 폐사된 뒤 조선 중종 때인 1509년 영천군 자민루(字民樓) 아래로 옮겨졌고, 1918년에 비신(碑身)만이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져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두었다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다.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명(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銘)


조선의 문신 성대중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를 두고 “그 획이 마치 삼만 근의 활을 당겨 한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고 평했다. 이러한 김생이었기에 두 세기기가 지난 당시에도 김생의 글씨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탑 서문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자서해 보았다.

聞夫 眞境希夷 玄津杳渺(문부 진경희이 현진묘묘) 듣건대 무릇 불법의 참된 경계는 심오하고, 깨달음의 세계는 아득하고 아득하니
澄如滄海 邈若太虛(징여창해 약약태허) 맑기가 푸른 바다와 같고, 아득하기가 하늘과 같으니
智舟何以達其涯 慧駕莫能尋其際(지주하이달기애 혜가막능심기제) 지혜의 배로 어찌 그 물가에 이를 것인가 또한 지혜의 수레로도 그 끝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탑비의 주인공인 낭공대사(朗空大師) 행적의 깨달음과 사람됨의 경지를 창해(滄海)와 태허(太虛)에 견주고 있다. 깨달음의 세계가 푸른 바다와 하늘 같이 아득해 그 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수행자의 어려움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비문은 나말여초의 문장가이자 명서가인 최인연(崔仁渷)이 지었고, 뒷면의 음기는 대사의 문하법손(門下法孫)인 순백(純白)이 지었다. 이 비는 비문이 지어진 뒤 오랫동안 세워지지 못하다가 954년에 이르러서야 순백 스님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글씨는 지름 2~3cm의 행서로, 낭공대사의 문인 단목(端目)이 김생의 글자로 집자(集字)했다. 이는 마치 당 태종 때 승려 회인이 왕희지의 행 · 초 필적을 모아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집자한 것과 유사한 경우이다.
왕희지체 자형에 근간을 두었으면서도 상투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짜임을 구사했기 때문에 고격(古格)을 잃지 않으면서도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특히 굵고 가는 획을 섞어 교묘한 변화를 주고 또 굽고 곧은 획을 섞어 음양향배(陰陽向背)의 묘를 살려낸 점이 두드러진다.
한편 김생이 쓴 석비로 경주의 <창림사비(昌林寺碑)>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비는 현존하지 않으며 탁본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관련 내용이 있는데, 원나라 명필 조맹부(趙孟頫)가 <창림사비>에 대해 "이것은 신라의 스님 김생이 쓴 신라국의 창림사비로, 자획이 매우 전형적이어서 비록 당인(唐人)의 유명한 비각일지라도 이보다 낫지 않을것이다."라고 한 평이 전할 뿐이다.
近見趙學士子昻昌林寺碑跋尾曰 右唐新羅僧金生所書其國昌林寺碑 字畫深有典刑 雖唐人名刻 未能遠過之也

조선 전기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당시 김생의 진적(眞迹)은 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여러 사찰에 김생이 쓴 사경(寫經)이 있었다고 하나 이 역시 믿기 어렵다는 당시 사람들의 언급이 전한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 역대 명서가의 필적을 모아 간행한 조선시대의 집첩(集帖) 가운데 김생의 필적이란 것이 대부분 <낭공대사비>의 일부이거나, 이것으로 다른 시문을 집자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짐작된다. 또 집자한 것이 아닌 새로운 필적이라도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의 필적으로 신빙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생의 필적이 실린 조선시대 집첩으로 안평대군 이용(李瑢)의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석각, 1443년 간행), 신공제(申公濟)의 《해동명적(海東名迹)》(석각, 16세기 간행), 이우(李俁)의 《동국명필(東國名筆)》(석각, 1667년 간행), 이지정(李志定) 전칭의 《대동서법(大東書法)》(목각, 17세기 간행), 박문회(朴文會)의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목각, 19세기 간행), 백두용(白斗鏞)의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목각, 20세기 간행) 등이 있다.
여기에 실린 김생의 필적 가운데 신빙성 있는 예로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를 들 수 있다. 이 필적은 『비해당집고첩』에 처음 보이며, 이후의 집첩에 지속적으로 실렸다. 현존하는 고(故) 임창순장(任昌淳藏) 『비해당집고첩』에는 동진 간문제(簡文帝), 양 무제(武帝), 위 종요(鍾繇), 동진 왕희지 · 왕헌지 등 중국의 제왕과 명현의 필적과 함께 김생의 필적이 들어 있는데, <낭공대사비>의 측면에 새겨진 이항(李沆)이라는 사람의 추기(追記)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 《비해당집고첩》에서 김생의 필적을 보았다는 구절이 있어 이를 방증해주고 있다.

전유엄산가서(田遊巖山家序)


<전유암산가서>는 전유암(田遊巖)이라는 은사가 지은 서문에 딸린 오언시 1수이다. 이 필적에는 "보덕사 김생서(報德寺 金生書)"라는 관서(款署)가 먼저 나오고 있어 그 앞에 서문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현재 <전유암산가서> 전체를 새긴 조선시대 각본이 다수 전하고 있어 이러한 짐작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각본의 초간 연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비해당집고첩》에 실린 것으로 보아 조선 초 이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전유암산가서>의 글씨는 작은 크기의 행서로 왕희지의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의 골격을 따랐으면서도 특유의 파격적 짜임과 자유로운 운필이 가미되어 있다. < 낭공대사비>에서 글자의 머리부분이 강조되고 자형이 납작하며 살찐 획법을 보이는 것과 달리, 이 필적은 자형이 좀더 변화롭고 획이 수경(瘦勁)하다. 또 <낭공대사비>에서 행서로만 일관하여 집자한 것과 달리 군데군데 초서를 섞은 점도 눈에 띈다. 고려의 이인로가 김생의 글씨는 초서도 아닌 듯 행서도 아닌 듯 57종의 제가체세(諸家體勢)로부터 나왔다고 극찬했는데, 이는 아마 이러한 필적을 보고 평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와 같이 <전유암산가서>는 <낭공대사비>에서 볼 수 없는 김생의 또 다른 면모를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낭공대사비> 다음으로 오랜 연조를 지녔다는 점에서도 중시된다. 그런데 이 필적이 과연 김생의 진적을 모각한 것인지 아니면 김생의 다른 필적으로 집자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 여부를 떠나 김생이 고법(古法)의 전형을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필적임에는 틀림없다. 파격적인 짜임과 변화로운 운필로써 외형적 정제미를 추구하지 않고 험경(險勁 : 굳세고 날카로움)한 서풍을 추구했던 김생의 대담한 정서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밖에 조선시대 집첩(集帖)에 처음 보이는 필적으로 《해동명적》에 실린 이백(李白)의 시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대자(大字) 행서, 《동국명필》의 <원화첩(元和帖)> 일부, 《대동서법》의 이백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대자 행서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필적은 <낭공대사비>나 <전유암산가서>의 서풍과 관련성을 지적하기 어려우며 이것들이 김생의 진적으로부터 유래한 것인지에 대해 신빙할 만한 자료나 근거는 전혀 없다.
그리고 김생이 썼다는 편액에 관한 기록과 구전이 몇몇 전한다. 그러나 이것들 역시 현존하지 않거나 혹 현존하더라도 오랜 세월동안 모각(摹刻)을 거듭하여 원형에서 멀어졌으며, 혹은 후대의 편액이 그의 것으로 가탁되어 전해졌을 가능성이 농후한 예일 뿐이다.
김생은 서예가로서의 대담한 독창성과 뛰어난 풍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서예를 일으킨 비조로서 널리 숭앙되어 왔다. 이런 점에서 김생의 서예는 우리시대의 문화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모범일 것이다. 즉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이를 외형적으로 모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를 우리의 토양 속에서 우리의 미의식에 맞게 변모 · 발전시킨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현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이다.
김생이 살았던 8세기뿐 아니라 남북국시대 전 시기를 통해 해서에서는 구양순을 비롯한 초당(初唐)의 서풍이 주류를 이루었고, 행서 · 초서에서는 왕희지를 비롯한 고전적 서풍이 주된 흐름을 형성했다. 이는 당시에 조성된 왕릉비(王陵碑)나 고승들의 탑비(塔碑)를 위시한 수많은 금석문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김생 역시 초기의 학습시절에는 당시 서예의 일반적 흐름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김생은 이런 시대적 흐름에 얽매이지 않은 일탈한 필적을 남기고 갔다. 김생의 행서는 왕희지 서풍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이미 그것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파격적인 짜임과 변화로운 획법으로 남북국시대 서예가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 개성적 풍격을 이루었다.
김생의 신빙성 있는 행서 필적인 <낭공대사비>와 <전유암산가서>는 후대에 집자하고 모각한 것이기 때문에 원적에 나타나는 장법전체 구성과 운필의 묘를 적극적으로 살필 수는 없다. 그러나 글자마다 전형적 규범에 매이지 않은 대담한 면모가 드러난다. 점획에 태세(太細)와 방원(方圓)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짜임을 변화롭게 가미하여 소산(疏散)하고 방일(放逸)한 풍격을 보였다. 그중 <낭공대사비>는 옆으로 납작한 짜임과 원융(圓融)한 획법으로 돈후한 풍격을 이루었고, <전유암산가서>는 간간이 초서를 가미하는 등 짜임에 있어 변화의 극치를 이루고 수경(瘦勁 : 가늘면서 힘이 있음)한 획법을 구사한 점이 매우 돋보인다. 단지 김생의 해서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는 필적이 없어 명확하게 언급하기 어렵다.
김생의 필적을 살필 때 유의할 사항이 있다. 일반적으로 집자에서는 원적의 글자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지만 자형이 없을 경우 필요한 변 · 방 · 머리 · 받침을 다른 글자에서 따다가 맞추게 된다. 따라서 자형이 불안정한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김생의 집자 필적에도 이런 예가 있어 더욱 변화롭고 동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생의 글씨는 자기화의 성숙도에 있어 단연 독보적이며, 이런 특성이 바로 후대인들로부터 높은 찬상을 받는 주된 요인이라고 본다. 김생은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이를 모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또 시대적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행로를 꾸준히 추구해 갔던 선구자로 추앙받을 만하다. 이러한 점에서 김생은 우리의 문화를 우리의 토양 속에서 우리의 미감에 맞게 발전시켜가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현명하게 풀어줄 수 있는 모범적 선례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및 한국역대 서화가 사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