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택당 이식 영신연(澤堂 李植 詠新燕)

소개하고자 하는 택당 이식(澤堂 李植)의 영신연(詠新燕)은  여강(驪江 : 여주)에 살다가 칠서(七庶)의 옥사(獄事)에 휘말릴까 염려하여 서울로 들어갔다가 부친상을 당하고 부친의 삼년상을 마친 33세에 새로 돌아온 제비를 노래한 것이다.

제비는 예로부터  시의 소제로 많이 등장하는 친숙한 여름 철새로 참새목 제비과에 속한다.  조사자료에 따르면 어미새는 약 5%, 새끼 새는 약 1%가 같은 장소로 돌아온다고 한다. 택당 선생 또한 초봄에 날아온 제비를 바라보며 이처럼 깊고 특색 있게 표현한 멋진 시를 읊었으리라.  뛰어난 학자이자 문신으로 파란만장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행장을 기록을 통해 살려보고자 한다.

 

영신연(詠新燕 : 새로 돌아온 제비를 보고 읊다)

萬事悠悠一笑揮(만사유유일소휘) 잡다한 세상만사 그저 한바탕 웃음거리

草堂春雨掩松扉(초당춘우엄송비) 사립문 닫은 초당에 봄비 촉촉이 내리네

生憎簾外新歸燕(생증렴외신귀연) 주렴 밖에 새로 돌아온 제비를 미워하는 것은

似向閑人說是非(사향한인설시비) 일 없는 사람에게 시비 걸기 때문이라네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 ~ 1647)은 조선시대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좌의정 이행(李荇)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는 좌찬성에 증직 된 이안성(李安性)이고 어머니는 무송 윤 씨(茂松尹氏)로 공조참판 윤옥(尹玉)의 딸이다.

이식은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1613년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친 정 7품에 해당하는 설서(設書)를 거쳐 1616년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선전관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했다. 그 후에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1621년 관직에 나오라는 명을 계속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교분이 있었던 친구들이 조정의 주요직에 진출하게 되자 발탁되어 이조좌랑(吏曹佐郞)에 등용됐다. 이듬해에 부수찬·응교·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625년(인조 3) 예조참의·동부승지·우참찬 등을 역임했고 다음 해에 대사간·대사성(大司成)·좌부승지 등을 지냈고 1632년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 역임했다. 임금의 종실을 사사로이 기리고 관직을 이유 없이 높이는 일이 법도에 어긋남을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간성 현감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633년에 부제학을 거쳐 1636년에 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1640년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한다고 하여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돌아올 때에 다시 의주(義州)에서 청나라 관리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1644년 예조·이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646년 별시관(別試官)으로 과거 시험의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그가 출제한 문제에 역모의 뜻이 있다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기도 했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 사대가로 꼽혔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됐다.

문집으로는 택당집(澤堂集)이 전하는데 한시의 모든 갈래에 두루 능숙했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체로 정경의 묘사가 뛰어나고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풍광을 읊은 시가 많다. 고체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오언율시에 특색을 발휘했다.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두시비해(杜詩批解) 등을 저술했으며 수성지(水城志)·야사초본(野史初本) 등을 편찬했다.

 

김택영(金澤榮)에 의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고문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는 사간원차자(司諫院箚子) 등의 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사후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 됐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686년 영의정에 추증됐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택당집서(澤堂集序)에 이식(李植)의 학문과 간략한 행적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가 문헌(文獻)이 성하기로는 본조(本朝)가 가장 으뜸이었다. 굉유(宏儒)와 석사(碩士)가 연달아 나왔고, 그들의 편장(篇章)과 사명(辭命, 국제 간에 왕복(往復)한 문서)이 모두 간행(刊行) 전포(傳布)되었으니, 모두를 합해 놓고 헤아려 보면 한우충동(汗牛充棟)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 의리(義理)가 정밀하고 논의가 정당해서 사문(斯文)의 우익이 될 만하고 세도(世道)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구하려 한다면 택당공의 문고(文稿)가 가장 훌륭할 것이다. 대체로 듣건대, 공은 어려서부터 사서(四書)·육경(六經)과 이정전서(二程全書)·주자전서(朱子全書)·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글에 전심하였고, 여가에는 제가서(諸家書)를 남김없이 박람(博覽)하였다. 

(我東文獻之盛 莫如本朝 宏儒碩士 步武相接 其篇章辭命 皆登梓傳布 總而計之 則將至於充棟宇汗牛馬矣 然求其義理之精 論議之正 可以羽翼斯文 裨補世道者 則未有若澤堂公文稿者也 蓋聞公自幼 專意於四子六經程朱全書性理大全等書 以其餘暇 泛濫諸家 博極無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