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지환(王之渙. 696~720) 성당(盛唐) 시대 시인이며 자는 계릉(季陵)이다.
등관작루 시는 중국 유명인사들이 자주 인용하는 명구로 관계 발전을 위해 가일층 노력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관작루는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용지현(永濟縣)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교훈적인 내용을 살펴보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등관작루(登鸛雀樓 : 관작루에 올라)
白日依山盡(백일의산진) 해는 산에 의지한 체 사라지고
黃河入海流(황하입해류) 황하는 바다로 흘러가네
欲窮千里目(욕궁천리목) 멀리 천리 바깥을 더 보려고
更上一層樓(갱상일층루) 누각 한 층을 다시 오르네
관작루(鸛雀樓)는 중국의 유명한 고대 누각 중 하나이다. 황학루(黃鶴樓), 악양루(岳陽樓),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중국 고대 역사 문화의 유명한 사대 누각으로 불린다.(다른 설은 황학루, 악양루, 등왕각, 봉래각(蓬萊閣)이다)
관작루의 원래 위치는 산시성(山西省) 푸주(蒲州)이다.(현재는 山西省 永濟市 蒲州)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북주(北周)와 북제(北齊)가 이 마을에서 군사 대치상황을 이루고 있었다. 북주(北周)의 장군 우문호(宇文護)는 방어를 위해 푸저우주(푸주) 서문 밖에 한 채의 높은 누각을 건축해 군사 전망대로 삼았다. 항상 황새가 누각 위에 둥지를 틀어 머물며 보금자리로 삼았기 때문에, 관작루라 불린다. 이 지역에서 황허(黃河)강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역대 대단히 많은 문인이 관작루에 올라 옛날을 생각하며 감흥을 토로하도록 이끌었다.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따르면, 하중부의 관작루에 당조 때 사람들이 머무르며 쓴 시가 매우 많다. 다만, 이익(李益), 왕지환(王之渙) 등 당나라 때 시인의 시 세편은 그러한 풍경을 잘 나타낸다.
최초의 관작루는 원나라 때 전쟁으로 처음 훼손되었다. 명나라 이후 황하의 물길이 바뀌었기 때문에 옛 자취는 이미 찾기 어려워졌다. 다만 왕지환의 시구가 많은 사람들이 변함없이 회상하러 오도록 이끈다는 점에 비추어, 후인들은 바로 푸저우주(蒲州)성 서문 누각을 관작루로 삼고, 대단히 많은 시조를 남겼다. 그러나 새로운 관작루는 가정년(嘉靖年)에 없어졌다. 왜냐하면 황하가 홍수에 휩쓸려 물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997년 12월 관작루 재건을 시작하고, 2002년 8월 완공되었다. 새로 세운 누각은 당대의 높은 누각을 모방했다. 누각의 높이는 73.9m이다. 건축한 총면적은평방미터이고, 총 투자금은 3550만 위안이다. 누각의 중앙에 왕지환의 청동 주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1층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손수 쓴 등관작루(登鸛雀樓)가 걸려있다. 모택동이 생전에 이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 현재 6점의 친필 원고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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