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양촌 권근 시 몇 수(陽村 權近 詩 몇 首)

양촌 권근(陽村 權近. 1352~1409)은 본관 안동(安東), 자 가원(可遠), 사숙(思叔), 호 양촌(陽村), 시호 문충(文忠), 초명 진(晋)이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고, 우왕(禑王) 때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 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 ,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사첨서사(密直司僉書事)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5년(우왕 1) 박상충(朴尙衷),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1389년(창왕 1)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화근이 되어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가 영해(寧海), 흥해(興海), 김해(金海)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또다시 청주(淸州)에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3년(태조 2)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 대사성, 중추원사(中樞院使) 등을 역임하고,

13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불안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부참찬사(文下府參贊事)를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사병(私兵)의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 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대사성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거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이사(貳師) 등을 역임하였고,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經學)에도 밝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였다. 또한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 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문집 양촌집(陽村集) 외에 저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고, 작품에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다.

 

양촌 선생은 삼봉 정도전에 비하여 주목받지 못했으나 그가 남긴 문집과 저서, 행장을 살펴보면 조선 건국의 안정적 기반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안동권씨의 자랑이기도 하다. 양촌 선생의 문학적 진가를 느낄 수 있는 한시 몇 수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춘일성남즉사(春日城南卽事 : 봄날 성남(城南)에서의 즉흥시)

春風忽已近淸明(춘풍활이근청명) 봄바람에 어느덧 청명절이 다가오니

細雨霏霏晩未晴(세우비비만말청) 가랑비 부슬부슬 내려 늦도록 개질 않네

屋角杏花開欲遍(옥각행화개욕편) 집 모퉁이 살구꽃은 온통 필 듯한데

數枝含露向人傾(수지함로향인경) 이슬 머금은 몇 가지가 내게로 치우치네

 (정도전은 이 시를 보고 “시어가 천지조화를 빼앗았다”라고 극찬했다)

 

야음(夜吟 : 밤에 읊다)

散步中庭自詠詩(산보중정자영시) 뜰을 거닐며 저절로 시를 읊으니

一天雲月夜晴時(일천운월야청시) 온 하늘에 구름과 달 떠 있는 맑게 개인 밤

乍看不省梢頭雪(사간불성초두설) 언뜻 봐서 가지 끝에 눈 쌓인 줄 모르고

誤擬梅花滿舊枝(오의매화만구지) 묵은 가지에 만개한 매화꽃인가 헤아리지 못했네

 

사향운(思鄕韻 : 고향 생각에)

白雲天末是吾鄕(백운천말시오향) 흰 구름 흐르는 저 하늘 끝엔 내 고향 있는데

處處登樓客恨長(처처등루객한장) 이곳저곳 누각 오르니 나그네 시름만 길어

最憶南江煙雨裏(최억남강연우리) 남강의 물안개 너무 그리워서

釣船終日泛滄浪(조선종일범창랑) 창랑에 낚싯배를 종일토록 띄웠지

 

행화(杏花 : 살구꽃)

一林殘雪未全銷(일림잔설미전소) 온 숲에는 잔설은 아직 녹지 않았는데

曉雨晴來上樹梢(효우청래상수초) 새벽에 비 개이자 나뭇가지 위에 새순이 돋았네

嫩日釀成和氣暖(눈일양성화기난) 새로운 햇살이 온화한 기운을 자아내면

微酡顔色更驕饒(미타안색경교요) 불그레한 꽃 빛이 더욱 풍성하겠지

 

수기(睡起 : 잠에서 깨어 일어나)

白日偸閑入睡鄕(백일투한입수향)  한낮에 한가함을 틈타 잠 세상으로 들어가니

邯鄲世事又奔忙(한단세사우분망) *한단침의 세상사 또다시 바쁘구나

不如花下傾春酒(불여화하경춘주) 차라리 꽃 아래서 봄 술잔 기울이며

醉裏悠然萬慮忘(취리유연만려망) 한가로이 취해서 온갖 시름 잊어야지

* 한단침(邯鄲枕) :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榮華)의 헛됨의 비유

 

숙감로사(宿甘露寺 : 감로사에서 묵다)

煙蒙古寺曉來淸(연몽고사효래청) 연기 자욱 절에 새벽 그지없이 맑은데

湛湛庭前柏樹靑(담담정전백수청) 이슬 내린 뜰 앞에 잣나무가 푸르구나

松韻悄然寰宇靜(송운초연환우정) 소나무 운치는 초연하여 세상은 마냥 고요한데

涼風時拂柳絲輕(량풍시불유사경) 때때로 서늘한 바람 불어 버들가지 흔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