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慧超, 704~787)는 신라 시대의 승려이다. 밀교(密敎 : 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직설적으로 은밀하게 표출시킨 대승불교의 한 종파)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719년 중국의 광주(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배웠고, 723년경에 4년 정도 인도 여행을 한 뒤, 733년에 장안의 천복사에 거주하였으며, 780년에는 중국 오대산에서 거주하며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진다. 혜초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우연 일치(偶然一致) 치고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중국 돈황석굴에서 1200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중국으로서는 통탄할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는 1897년 경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왕도사로 알려진 왕원록(王圓籙)에 의하여 처음으로 발견되고 이후 소문이 퍼지면서 프랑스 탐험가 펠레오에 의하여 필사본이 프랑스로 옮겨져 비로소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으며, 1915년 일본 불교학자 다까쿠스에 의하여 혜초가 신라의 구도승이라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 누구나 알고 있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관련 정보는 불교신문, 한국인물사 등의 내용을 참조하였으며, 왕오천축국전에 기록된 혜초의 시 몇 수와 함께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약 1300년 전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으리라.
불교의 본고장으로 향한, 순례자의 길
전인미답(前人未踏),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걸어간 사람의 전통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한 전통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구도(求道)의 길을 따라 인도까지 걸어서 갔다 온 순례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사람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 : 남북국시대 불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와 천축국에서 유학한 승려)는 처음에 불교의 본디 모습을 보러 중국에 들어갔는데, 용기가 더욱 솟아 결국 오천축국(五天竺國)까지 이르렀다. 오천축국이란 인도 북부 지방에 있었던, 부처님이 나신 나라를 비롯한 다섯 천축국을 말한다. 중천축국과 동서남북의 넷, 그래서 오천축국이다. 아리나발마는 나란타사(那爛陀寺)에 머물며 ‘율론(律論 : 불교의 계율과 이론)을 많이 열람하고 패협에다 베껴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웬만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 모양이다.
패협은 패엽(貝葉)이라고도 쓰며, 경전을 기록하는 기다란 나뭇잎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뭇잎을 재료로 한 고급 종이인데, 살생을 금한 불교의 법칙에 따라 동물 가죽 대신 썼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패협은 무척 고급스럽게 보인다. 가난한 순례자들은 제 몸의 치장 대신 이 종이를 사는 데 재물을 모두 바쳤으리라. 나란타사는 중인도 마갈타국(중인도의 동부지역에 있던 고대국가)에 있던 절인데, 5세기에서 12세기까지 불교를 가르치던 대학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서유기(西遊記)로 잘 알려진 손오공의 스승 현장도 이 절에서 5년간이나 머물며 공부했다.
이 같은 이야기를 일연(一然)은 중국 승려 의정의 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에서 전적으로 인용해 삼국유사에 적어 놓았다. 본디 이름이 대당 서역(大唐西域) 구법 고승전으로, 7세기 말 의정이 스스로 인도 순례를 하며 지은 책이다. 인도까지 구법 여행을 한 승려들의 전기를 실은 것인데, 아리나발마를 비롯한 모두 60인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동국(東國)인 곧 신라 사람이 무려 9명이나 된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15%에 달한다. 한편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의정(義淨)의 승전(僧傳)에 없는 현조와 현대범이란 이름이 보인다. 의정의 승전에 나오는 현태와 구본이 이들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숫자는 더 불어난다.
귀(歸), 한번 가서 돌아오지 못한 순례자들
그러나 왕오천축국전의 지은이인 혜초는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인도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이 혜초인데 말이다. 먼저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그의 시 한 편을 읽어보자.
파밀음(播密吟 : 파일고원을 넘으며 읊다)
냉설견빙합(冷雪牽氷合)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한풍벽지열(寒風擘地烈)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거해동만단(巨海凍墁壇)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하릉애교(江河凌崖嚙)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룡문절폭포(龍門絶瀑布)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정구반사결(井口盤蛇結) 정구(井口)엔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반화상해가(伴火上胲歌) 불을 들고 땅끝에 올라 노래 부르리
언능도파밀(焉能度播密)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가리오
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을 오르는 그의 가슴속에는 불 같은 열정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파밀고원은 멀기만 하고 생사를 오가는 여행길은 불안하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런데도 두려운 마음을 때로 기도하며 때로 노래하며 풀어내고, 사막과 얼음 구덩이로 발걸음을 옮긴 그들에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다는 것일까? 같은 길을 따라 거슬러 왔던 전도자들을 생각하며 걸었던 것일까?
해동의 작은 나라 신라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아리나발마처럼 처음에는 중국까지만 가려다가 인도까지 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이들의 기록에다 ‘귀축제사(歸竺諸師)’라 제목을 붙인 것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귀(歸),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곳이 진정 돌아갈 곳이었는지 모른다.
중국 정통 밀교(密敎)의 법맥(法脈)을 이은 혜초
아리나발마는 ‘돌아오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란타사에서 죽는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현태는 그나마 중국까지 돌아온다. 그러나 그 역시 어디서 죽었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순례자의 마음이지만, 범인(凡人)의 그것에 조금이나 가까운 것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首丘初心) 하나일까? 혜초는 다른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사향시(思鄕詩 : 고향을 그리워하며)
月夜瞻鄕路(월야첨향로) 달밤에 고향길의 하늘을 바라보니
浮雲颯颯歸(부운표표귀) 뜬 구름 시원스레도 흘러가는구나.
喊書參去便(함서참거편) 소식 적어 그 편에 부칠 수도 있건만
風急不廳廻(풍급불청회) 빠른 바람결은 아랑곳도 않누나.
我國天崖北(아국천애북) 내 나라 하늘은 먼 북쪽 끝
他邦地角西(타방지각서) 이곳은 남의 땅 서쪽 변방
日南無有雁(일남무유안) 무더운 남방엔 기러기도 없으니
誰爲向林飛(수위향림비) 뉘라서 계림을 향해 날아가 줄까
기러기 발목에 편지를 묶어 날렸다는 고사가 있거니와, 그런 기러기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막막한 심정이 잘도 그려져 있다. 혜초가 언제 어떤 연유로 중국을 가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기록으로 그가 중국 밀교의 초조(初祖) 금강지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 719년, 곧 그의 나이 열다섯 살일 때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강지는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스승의 문하에서 5년을 수학한 혜초는 감연(敢然) 히 인도 여행을 떠난다. 갈 때는 해로로, 돌아올 때는 육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8세기경, 인도 풍경을 소략하게나마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물론 그의 존재는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P. Pelliot, 1878~1945)의 둔황 석굴 발견과 1909년 중국인 나진옥(羅振玉)의 손을 거쳐, 1915년 일본인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노봉한사(路逢漢使 : 길에서 서번 가는 사신을 만나다)
君恨西蕃遠(군한서번원) 그대는 서번이 멀다고 한탄하나
余嗟東路長(여차동로장) 나는 동방으로 가는 길이 멀어 한숨만 나누나
道荒宏雪嶺(도황굉설령) 길은 거칠고 고개 위엔 눈만 가득
澗險賊途猖(간험적도창) 험한 골짝에는 도적떼만 날뛰고
鳥飛驚峭嶷(조비경초억) 날아가는 새는 깎아지른 산에 놀라고
人去難偏梁(인거난편량) 사람들은 좁은 다리 앞에서 주춤주춤
平生不捫淚(평생불문루) 내 평생 눈물 흘릴 줄 몰랐는데
今日灑千行(금일쇄천행) 오늘은 천 갈래 눈물을 뿌리 누나
‘서번 가는 사신을 만나’라는 제목의 시이다. 서번(西蕃)은 서쪽 오랑캐 나라인 토번이다. 지금의 서장이라 부르는데, 이때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나라의 문물을 교류하며 번성하였다. 설령(雪嶺)은 눈 쌓인 봉우리이지만, 여기서는 히말라야 산맥을 일컫는다.
한참 인도 여행이 무르익을 무렵, 혜초는 우연히 서번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게 된다. 설령은 도적떼 출몰하는 계곡이었기에 대국의 사신답지 않게 코를 빼고 가고 있다. 처량한 모습이다. 그러나 하늘 나는 새마저 놀라는 길을 사람이 무슨 재주로 편히 지날 수 있겠는가. 승려인 혜초마저 펑펑 눈물을 쏟는다. 그런 고행의 대가(代價)였을까, 혜초는 귀국하여 스승의 총애 아래 수행 정진하여, 중국 밀교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금강지 불공(不空) 법맥을 잇는 제자로 우뚝 섰다.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
혜초가 남긴 몇 편의 시를 통해 우리가 받는 감동은 단지 전인미답의 길에서 정진한 그의 용맹함 때문만은 아니다. 도리어 약하고 쓸쓸한 심정을 숨김없이 내보이는 그 솔직성 때문이다. 지극히 인간적이다. ‘슬픈 죽음’이란 시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다.
애북천축나게나태나사한승사(哀北天竺那揭羅馱那寺漢僧死 : 덕망 높은 어느 스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故里燈無主(고리등무주)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
他方寶樹摧(타방보수최) 이국 땅 보배로운 나무 꺾이었는데
神靈去何處(신령거하처) 그대의 영혼 어디로 갔는가
玉貌已成灰(옥모이성회) 옥 같은 모습 이미 재가 되었거늘
憶想哀情切(억상애정절) 생각하니 서러운 정 애끊고
悲君願不隨(비군원불수) 그대 소망 이루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孰知鄕國路(숙지향국로) 누가 알리오, 고향 가는 길
空見白雲飛(공견백운비) 흰 구름만 부질없이 바라보는 마음.
혜초는 동천축국과 중천축국을 지나 남천축국으로 향하였다. 그의 나이 이십 대 초반. 막 스물 접어들어 여행을 떠나 동서남북중의 다섯 군데로 나뉜 인도를 4년에 걸쳐 여행했다. 이미 동천축국과 중천축국에서 쿠시나가라∙바라나시∙라자그리하∙룸비니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불교의 성지를 둘러본 다음이었다. 그리고 혜초가 북천축국에 이르렀을 때 여행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곳의 한 절에서 덕망 높은 승려 한 사람이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위의 시는 그에 대한 뜨거운 애도의 노래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혜초와 같은 수행승들은 목숨을 걸고 불법을 찾아 이 사막을 건넜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가운데 ‘귀축제사(歸竺諸師 : 신라 승려로 인도까지 이른 求法僧들에 대한 기록)’ 조의 일부를 앞서 소개했다. 인도기행을 떠난 승려들의 아름답고도 장한 이야기가 자세히 실려 있다. 요즈음도 인도기행이 상당한 붐을 이루지만, 당대 승려들의 여행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것이었다. 목숨을 건 여행의 시종기(始終記),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스릴러 영화의 라스트 신과 달리 살아남은 주인공이 아무도 없다.
달빛 타고 떠나간 순례자(석장) 가운데 구름 따라 돌아온 이 아무도 없다. 혜초는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라는 첫 행부터 사람의 애를 끊는 표현으로 시작하였다. 이 한 줄로 그 심정을 헤아리기에 족하다고 본다.
왕오천축국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중국과 인도로 구법여행에 오른 모든 스님들이 다 위대하지만,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스님 가운데 한 분이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 혜초(慧超) 스님이라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혜초 스님이 태어난 연대는 안타깝게도 미상이다. 700년이라는 사람도 있고, 704년이라는 학자도 있다. 16살 때인 신라 성덕왕 18년(719) 중국에 건너간 혜초 스님은 광주(廣州)에서 남천축 출신 밀교승(密敎僧) 금강지(金剛智) 삼장(671~741)의 제자 불공(不空)스님(705~774)을 만나 밀교에 대해 배웠다. 당시 금강지, 불공스님은 사자국(스리랑카)과 수마트라를 거쳐 719년 중국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에 머물던 그들은 얼마 후 낙양과 장안에 가 밀교를 전파했는데, 혜초스님은 금강지스님과 불공스님이 낙양과 장안에 가기 전 그들을 만나 밀교에 관해 익혔다.
배우는 도중 혜초 스님은 천축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부처님 나라 천축에 가고픈 원력과 남천축 출신 스승 금강지스님의 권유에 따라 혜초스님은 신라 성덕왕 22년(개원 11. 723) 광주를 떠나 해로로 도축(渡竺), 4년간 천축 각지와 서역 각국을 순방하고 개원 15년(727)년 11월 상순 당시 안서도호부가 있던 쿠차를 거쳐 장안에 도착했다. 혜초 스님의 목숨을 건 구법여행은 안타깝게도 1200년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1908년 돈황 천불동 제17굴에서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가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자 혜초스님의 구법행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오렐 스타인이 돈황석굴 제17 굴(장경동)을 발견한 왕원록(王圓籙)을 꾀어 수많은 전적(典籍)들을 싣고 간 다음 해인 1908년.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도 돈황에 도착해 왕원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스타인과 달리 한문과 중국 문헌에 정통했던 그는 왕 도사(王圓籙)를 달래는데 성공, 17동에 남아있던 나머지 필사본들을 얼마든지 골라낼 수 있었다. 당나라, 송나라 이래의 진귀한 불경을 포함한 중요한 사본 5,000여 종을 구해 프랑스로 가져갔다. 펠리오가 갖고 간 사본들은 현재 프랑스 국민도서관과 기메박물관에 보관돼 있는데, 〈왕오천축국전〉도 그 안에 들어있었다.
당나라 시대 사본이 그러하듯 〈왕오천축국전〉 사본도 두루마리 모양으로, 첫머리도 끝머리도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책이름도 저자도 알 수 없는 사본이었다. 다만 지질과 필적에 의해 9세기경의 것으로 판단됐다. 박식한 펠리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필사본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펠리오는 일찍이 당나라 혜림스님(慧琳. 768~820)이 쓴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100권. 810년 편찬)이다. (일체경음의)는 “여러 가지 불교 관계 서적에 대한 주석서이자, 어려운 문구나 고유명사 등의 음이나 뜻을 풀어놓은 일종의 어휘사전”격인 책을 이용한 적이 있었는데,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어휘들을 〈일체경음의〉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日불교학자 다까쿠스에 의해 ‘신라인 혜초’밝혀져
1904년 발표한 ‘8세기 말 중국에서 인도로 간 두 여행가’라는 논문에서 펠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혜초스님에 관해 나는 불행히도 아무런 실마리를 발견치 못했다. 〈일체경음의〉의 저자 혜림스님이 주석붙인 어휘들의 순서로 보아 이제는 없어진 이 여행기는 3권으로 되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여행기는 중국으로부터 남해를 거쳐 인도로 가, 거기서 투르키스탄을 지나 중국으로 돌아온 기록임을 알 수 있다. 혜림스님의 〈일체경음의〉가 810년에 저작됐기에 혜초스님의 여행기는 그 이전 기록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평소 혜초스님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펠리오에게, 돈황석굴은 뜻밖의 선물을 했다. 〈왕오천축국전〉 필사본을 그에게 안겨준 것이다. 펠리오는 1908년 쓴 논문 ‘중국 감숙성에서 발견된 중세기의 한 서고’에서 “길지만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대로 옮겼다. 이렇게 썼다. “마침내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하나의 새로운 여행기를 찾아냈다. 이는 의정(義淨)스님과 오공(悟空)스님과의 중간 시기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 책은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나 나는 책이름과 저자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일체경음의〉에는 법현스님의 〈불국기〉대한 간단한 주석이 있고, 바로 그 옆에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좀 더 긴 주석이 있다. 수년 전 나는 혜초스님이 중국을 떠나 남해를 거쳐 서북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다녀 돌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나로서 더 첨가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혜초스님의 여행은 서기 700년 이전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기년(紀年)으로는 도시 한 군데 밖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지극히 정밀하게 나온다. 즉 그는 안서도호부에 개원 15년(729) 도착했다고 기록했다. 혜초스님은 거기서 절도대사(節度大使)인 조(趙)를 만났는데, 우리는 다른 사료를 통해 조가 실제 그 때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리하여 내가 발견한 이 무명의 여행기는 그 주요 부분이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임을 알 수 있게 됐다.”
펠리오가 발견한 〈왕오천축국전〉은 중국인 학자 나진옥(羅振玉)이 1909년 검토, 교감해 그의 저서 〈돈황석실유서〉에 수록, 발간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어 1911년 일본인 학자 후지다(藤田豊八)가 ‘본문에 자세한 주석을 붙인’ 〈혜초왕오천축국전〉을 펴내, 혜초스님이 실지로 어느 지방을 어떻게 다녔는지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혜초스님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1915년 일본인 불교학자 다까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의 〈혜초전고(慧超傳考)〉가 발표되자, ‘혜초스님이 신라인’이라는 것을 포함한 제반 사실이 비로소 밝혀졌다.
(출처 : 한국인물사, 불교신문 내용 등 편집)
'삶의 향기 > 차한잔의 여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허 성우선사 행장(鏡虛 惺牛禪師 行狀) (0) | 2022.04.04 |
---|---|
나업 시 상춘, 탄유수(羅鄴 詩 賞春, 嘆流水) (0) | 2022.04.01 |
혜암스님 게송 3수(慧菴스님 偈頌 3首) (0) | 2022.03.24 |
관악산 춘설경(冠岳山 春雪景) (0) | 2022.03.23 |
상촌 신흠 인간삼락(象村 申欽 人間三樂) (0) | 2022.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