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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초정 박제가 우수(楚亭 朴齊家 雨收)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의 불청객이던 미세먼지와 황사가 올해는 자취를 감추고 매일 산에 오르는 새벽 공기가 상큼하게 다가오며 저 바다 멀리 작은 섬들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초미세먼지 농도가 최근 3년 평균에 비해 20% 가까이 줄었다고 한다.

황사가 관측된 날도 작년에 비해 반 이상 줄어든 것은 중국 발 대기오염 물질을 바람이 쫓아낸 덕분이다.

중국의 작년도 1인당 GDP(명목, USD)는 약 1만 4천 달러로 만 달러가 넘어서면서 환경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대기 오염물질 배출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매년 중국 발 오염으로 인한 피해는 조금씩 줄어질 것이다.

급속한 산업발전 과정에서 훼손된 자연은 우리 세대에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함께 살펴볼 한시는 초정(楚亭) 선생의 우수(雨收)로 콩 꽃이 피어나는 이맘때 비 개인 농가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우수(雨收 : 비 개인 후)

嶺上雲黃似有虹(영상운황사유홍) 고갯마루 황색 구름 무지개 선 듯하고

雨聲猶在荳花中(우성유재두화중) 비 소리는 오히려 콩 꽃에 머물러 있네.

戴蓑老叟立堤外(대사노수입제외) 도롱이 쓴 노인 방죽 가에 서있고

溝水出來桑樹東(구수출래상수동) 시냇물은 뽕나무밭 동편으로 흘러가네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 ~ 1805)는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문인 화가로서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차수(次修) · 재선(在先) · 수기(修其)이며, 호는 초정(楚亭) · 정유(貞蕤) · 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박율(朴栗)의 6대손이며, 승지 박평(朴坪)의 서자(庶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박지원(朴趾源)의 제자이며, 청조(淸朝)의 선진문물을 본받을 것을 주창한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박제가는 아버지부터 현조부까지 무려 5대가 연속으로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신분이 서자였던 탓에 승지의 아들이더라도 진정한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아버지 박평은 박제가를 아끼고 잘 대해주었으며 박제가에게 글재주가 있음을 알자 아들이 글을 배우도록 도와주었다.

 

1761년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국법은 한양 도성 내에서 집을 사고파는 것으로 위장한 채 함부로 일반 백성들의 집을 빼앗는 행위를 금하였는데, 이를 '탈입(奪入) 금령(禁令)'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조가 법을 제대로 시행하는지 점검하고자 불시에 위반자 목록을 보고하라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박제가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 씨가 걸려들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아서 박제가의 어머니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신하들은 '박제가의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고 이씨가 미망인이자 첩인 점을 감안해서 정상을 참작하자.'라고 했지만, 영조는 '일일이 사정을 봐줘서는 끝도 없다.'는 다른 신하의 주장을 인용해서 원칙대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에서 금령 위반자가 받는 처벌은 벽지유배형(僻地流配刑)이었다. 그러나 이 씨는 여자라서 유배형에 처할 수 없었고 아들 박제가 또한 당시에는 11세 미성년자였는지라, 대신 집안 노비 중 1명을 덕원으로 유배를 보내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어머니 이 씨는 이 사건 이후 집안을 나와야 했고 청교, 필애, 묵동 등으로 계속 이사를 다녔다. 이후 박제가의 어머니는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렸기에 박제가는 가난하게 살아가야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을 아끼며 가난한 살림에도 박제가가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글재주 뛰어난 명사(名士)가 있다면 직접 찾아가서 아들에게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며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주기도 했다.

 

1766년 박제가는 17세 나이로 스승 이관상(李觀祥)의 첩이 낳은 둘째 서녀(庶女)와 결혼했다. 장인이자 스승인 이관상은 박제가를 아껴 박제가 부부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집에 거주하게 하며 박제가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배려를 해주었다. 박제가는 아내와 사이에서 아들 4명을 두었다.

 

박제가는 어린 나이에도 서화(書畵)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인정받으면서 신동으로 평가받았으며 1768년 스승인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을 만나 제자가 되었고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 북학파 연구자들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북학파 연구에 관심을 두었다. 특히 박지원에게 많은 지식을 배웠으며 이외에 이덕무, 홍대용(洪大容), 류득공 과도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773년 박제가가 24세가 되었을 때 그 해 겨울에 어머니 이 씨가 고작 4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어머니와 사이가 각별했던 박제가는 어머니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박제가가 지은 『초정전서(楚亭全書)』, 「서풍수정기후(書風樹亭記後)」에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슬픔을 말하고 있다.

 

1779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되었으며 청나라로 가서 청나라 왕조의 문물 및 유물을 접하여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를 나누었는데 이때를 기록하여 『북학의(北學議)』를 집필했다. 이때부터 박제가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을 만나서 그와 친구가 되어 교류를 나누었고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청(奏請 : 근대시대 왕정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인 전근대시대까지 신하들이 임금에게 건의사항을 직접 올려 나라 발전에 힘을 쏟기 위한 행위) 하기도 하였다.

 

1791년 정조의 원자(훗날 순조)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연경에 건너갔다. 정조 사후인 1801년 연경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자마자 '흉서사건(凶書事件 : 조선 후기 권력 다툼과 사회모순이 격화되던 시기에, 임금·관료를 비난하거나 정치적 의도를 담아 ‘흉서(凶書)’를 투서·부착해 공포를 조장한 사건)'의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갔고 1805년 귀양이 풀렸으나 향년 56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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