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慶州)는 노천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가는 곳마다 그 옛날 문화의 정수를 담은 사찰, 석불 등 많은 사적지와 유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찬란했던 그때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왕조의 영화(榮華)를 살펴볼 수 있는 관광지이기에 울산을 들를 때면 이웃한 경주를 찾게 된다.
천년고찰(千年古刹) 경주 기림사(祇林寺)는 임진외란 때 승병활동의 요충지로 일제강점기까지 31본산(本山)의 하나였으며 불국사(佛國寺)를 말사(末寺)로 두었으나 이후 조계종(曹溪宗)에서는 불국사의 말사로 편성되면서 전말(前末)이 전도(顚倒)되는 과정을 겪은 사찰이다. 불국사에 비하여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천년고찰로서 소박하면서도 입지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곳이기에 경주를 여행하게 되면 한 번은 찾아가야 할 명소다.
비교적 근거리에 감은사지(感恩寺址)와 문무대왕 수중릉(文武大王 水中陵), 양남 주상절리(柱狀節理)가 있어 동해(東海)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기림사 관련 함께 살펴볼 한시는 670여 년 전 고려말 문신인 이달충(李達衷)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도임(都臨)하여 기림사를 찾아 예불한 후 반월성 관사로 돌아올 때 지은 시를 행서체로 자서와 함께 주변 명소를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제기림사(題祇林寺 : 기림사에 제하다)

聽梵祇林後(청범기림후) 기림사에서 법문을 들은 후
還官半月時(환관반월시) 반월성 관청으로 돌아올 때.
山深雲在峽(산심운재협) 산 깊어 골짜기에 구름이 일고
松老草生枝(송노초생지) 노송에 가지에 새싹이 돋았네.
勇少伊泥睡(용소이니수) 나약한 사슴은 잠이 들고
吟長款段疲(음장관단피) 지친 말은 긴 울음소리를 내고 있네.
此行眞可詑(차행진가이) 이번 여행은 진정 의미가 있어
觸處有新詩(촉처유신시) 닿는 곳마다 새로운 시가 있기 마련.
계림군 문정공 이달충(鷄林君 文靖公 李達衷. 1309 ~ 1385)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재추직(宰樞職)인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다. 호는 제정(霽亭),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부친은 첨의참리(僉議參理) 이천(李蒨). 외조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죽성군(竹城君) 박전(朴顓)이며, 이달충은 경주 이씨 제정공파(霽亭公派)의 파조(派祖)다.
1326(충숙왕 13)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였고, 동년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충숙왕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이학도감판사(吏學都監判事)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전리판서(典理判書), 1353년(공민왕 2)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였다. 1358년(공민왕 7)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있던 중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갔다.
동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있을 때 젊은 날의 태조와의 일화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이달충이 동북면 도순무사의 직무를 마치고 개경(開京)으로 돌아갈 때 환조(桓祖 :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환송을 나왔는데 환조가 주는 술은 서서 마셨으나 그 아들인 태조가 주는 술은 무릎을 꿇고 마셨다고 하며, 태조가 참으로 비범하므로 가업을 번창하게 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1359년(공민왕 8) 다시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왕이 이달충을 이름난 선비라 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에 발탁하였다. 후에 계림부윤(鷄林府尹)에 임명되었고, 1385년(우왕 11) 계림군(鷄林君)으로 있던 중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술로 제정집(齊亭集)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시문(詩文)은 당숙인 이제현(李齊賢)으로부터 크게 칭찬받았다.
(주변풍경)
▣ . 기림사(祗林寺)











기림사(祗林寺)는 경북 경주시의 함월산(含月山)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신라 때 인도 승려인 광유(光有)가 창건하고 이름은 임정사(林井寺)라고 했다. 643년에 원효(元曉)가 중창한 뒤 기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지는데, 석가모니 부처가 설법한 곳 가운데 하나인 기원정사(祇園精舍, 기수급고독원)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감포(甘浦) 앞바다에서 동해의 용왕으로부터 만파식적(萬波息笛)과 옥대(玉帶)를 선물로 받았다는 전설이 실려 있는데, 이때 신문왕이 귀환하는 도중에 기림사 서쪽에서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창건 연대는 적어도 신문왕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해 지은 감은사(感恩寺)의 터나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고려 시기에 기림사가 존재했던 사실은 삼국유사 탑상(塔像)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와 낙산사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등에 기림사 주지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승려 각유(覺猷)에 관한 내용이 전해지는 데서 알 수 있다.
전자는 고려 예종(睿宗) 때 전래한 불아(佛牙)가 1232년 강화로 천도할 때 분실되었다가 다시 봉안되는 과정, 후자는 고종 23년(1236년) 4월 왕의 원당인 신효사(神孝寺)의 승려 온광(蘊光)이 부처의 어금니에 절을 올리기를 청하여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을 시켜 궁중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이후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 수직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익명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시원전(十員殿)에 모시고 신효사 상방(上房) 고려 승려 온광(蘊光)을 청하여 재(齋)를 올리게 하였다는(그때 내전에서 향을 사르고 기도하던 역할을 각유가 맡고 있었다) 사실로, 모두 각유 자신이 듣거나 혹은 현장에 있으면서 본 것을 일연에게 들려준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신라 의상이 낙산사(洛山寺)에 간직해 두었던 보주(寶珠)가 몽고군의 침입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자 고종 45년(1258년) 10월 본업(本業)의 노숙(老宿) 기림사 주지 대선사 각유가 왕실에서 그것을 직접 간직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에 따라 야별초(夜別抄)를 보내 궁중에 모셨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숙왕(忠肅王) 복위 5년(1336년) 기림사의 주지(住持)는 대선사(大禪師) 선지(善之)였다. 이때 이루어진 감지은지 대방광불화엄경 권제60 사경발문(寫經跋文)에서 알 수 있다. 충혜왕(忠惠王) 복위 3년(1342년)에 세워진 자정국존(慈淨國尊) 미수(彌授)의 비명에는 미수의 문인 314명 중에 기림사 주지를 맡았던 원지대사(圓智大師) 행영(行英)이 있다. 14세기 전반기에 기림사 주지 두 명을 확인할 수 있다.
14세기 중 후엽에 기림사가 존재했던 사실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도임(都臨)한 이달충(李達衷)이 남긴 시 내용에 '기림사에서 부처를 배알하고 반월성의 관사로 돌아올 때'라는 구절이 있어서, 이달충은 경주부윤으로 도임하여 기림사에 예불하고 이 시를 지었다. 기림사가 몽골 침공이나 일본 원정으로 인한 부역 동원 등의 상황에서도 유지되어 경주부윤이 방문하여 예불할 정도의 위상을 가진 고찰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윤(府尹)은 지방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로, 종 2품 문관의 외직(外職)이며 관찰사와 동격이다
조선 세종 때의 선교양종으로의 불교 종파 통폐합 이후 기림사는 선종 18사의 하나로 진주(晋州)의 단속사(斷俗寺)와 함께 경상도에 위치한 선종 사원으로 그 위상을 드러냈다. 교종 18사에는 경상도 사원으로 해인사(海印寺), 견암사(見巖寺)만 언급되어 있는데, 경상도 지역 선교 양종 도합 36개 사찰 가운데 4개소만 사원전과 거승수(居僧數)가 인정되었고, 그 4개소 가운데 하나에 기림사가 들었다. 기림사는 속전(屬田)이 100결인데 50결이 더 추가되었고, 거승(居僧)은 70명이었다. 고려 시기 대선사의 승계를 소지한 승려가 주지하는 사원의 위상이 계속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는 전략적 요충지라 승병 운동의 중심지였다. 조선 철종 14년인 1863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건물이 남아 있다. 보물 415호인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을 비롯하여 소조비로자나삼존불, 기림사 삼층석탑, 목탑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불전 양식을 볼 수 있는 대적광전(大寂光殿), 김시습의 사당인 매월당사(梅月堂祠) 등을 보유하고 있다.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문적(文籍)과 어필(御筆)이 다수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31 본산의 하나였으나 조계종에서는 불국사(佛國寺)의 말사(末寺)로 편성되어 있다.













▣ . 감은사지(感恩寺址)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에 소재하며 통일신라시대 7세기에 조성되었다.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 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석탑으로 조성된 쌍탑 가람으로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금동 사리기(보물)와 금동 사리외함(보물)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삼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 . 문무대왕 수중릉(文武大王 水中陵)

문무대왕(文武大王)은 통일신라 제30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61년부터 681년이며, 아버지 무열왕이 다져 놓은 기반 위에서 삼국통일의 대업의 큰 뜻을 이뤘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나라를 걱정했다.
문무왕은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나라를 평안하게 지키겠노라 유언했다.
그 뜻을 받들어 문무왕의 유해를 육지(능지탑지로 추정)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에 뿌렸다.
양남면 봉길해변에 문무왕의 수중릉이 있다.
사적 제158호 문무대왕릉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위에서 대왕암을 내려다보면 동서남북으로 물길을 만들어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길은 대왕암 안쪽을 항상 잔잔하게 유지해 주는 장치로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여 있는데 이 아래에 문무왕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 경주 양남 주상절리(柱狀節理)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慶州 陽南 柱狀節理群)은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주상절리군은 2012년 국가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신생대 제3기의 에오세(5400만 년 전)에서 마이오세(460만 년 전) 사이에 경주와 울산 해안지역 일대의 활발했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당시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낮은 곳으로 흘러 급랭하면서 수축되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육각 또는 오각기둥 모양의 수직단열이다.
주상절리는 지표로 분출된 화산암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1차 구조로, 분출한 용암이 냉각되면서 수축될 때 형성된다. 따라서 암석의 온도이역(thermal history)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분출되면서 지표나 공기와 접촉하여 식기 시작하기 때문에 절리의 방향은 보통 지표면에 수직으로 발달한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을 이루는 현무암의 반정(斑晶)은 주로 사장석이다. 크기는 전체적으로 크기가 1㎜ 이상인 것이 20% 이상이며, 3㎜ 이상의 반정도 관찰된다. 석기(石基: 반상 석리에서 작은 결정이나 유리질로 된 부분)는 막대형의 사장석과 철산화물 · 유리질로 구성되어 있다. 사장석 반정은 알바이트 쌍정(雙晶)과 칼스바드 쌍정이 관찰되고, 누대구조(累帶構造)주5와 체구조(sieve structure)도 발달해 있다.
이곳 해변에는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 1.7㎞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주름치마, 부채꼴, 꽃봉오리 등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몽돌길, 야생화길, 등대길, 데크길 등 해안 환경을 고려한 테마로 1.7㎞에 걸쳐 주상절리 전 구간을 산책할 수 있는 파도소리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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