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김제 모악산 금산사(金堤 母岳山 金山寺), 한산자(寒山子) 선시(禪詩) 1수.

늦가을 찾은 김제 금산사(金堤 金山寺)는 모악산(母岳山. 796m)의 장중한 기맥(氣脈)이 이어져 영험한 기가 뭉쳐있는 혈(穴) 자리에 위치한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을 탐방하게 되었다.

처음 본 금산사는 대사찰의 면모를 두로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넓고 시원한 가람배치와 우람한 3층 규모의 미륵전은 조선시대 축조된 불전으로 미륵신앙의 성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깊어가는 가을풍경과 함께 떠나기가 아쉬워 오래 머물고 싶은 금산사는 한가함이 찾아오면 다시 한번 꼭 찾아오리라는 다짐을 해보며 천년고찰 금산사에 대한 풍경을 사진과 함께 한산자(寒山子)의 선시 한 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금산사는 특이하게 주련(柱聯)이 보이지 않은 연유가 사뭇 궁금해진다.

 

 (금산사 풍경)

우측 미륵전(彌勒殿), 중앙 적멸보궁(寂滅寶宮)과 대적광전(大寂光殿)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 (국보 제 62호)

 

김제(金堤)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는 백제법왕(百濟法王) 원년(599)에 창건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날까지 법등(法燈)을 밝혀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모악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금산사가 대사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眞表律師. 717 ~ ?)가 주석하며 시작되었다. 진표율사는 미륵전을 짓고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였으며 해마다 단(壇)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통일신라의 의적화상(義寂和尙)은 당나라 현장문하에서 유학하고 금산사에 돌아와 25부 70여 권의 방대한 유식사상(唯識思想 : 모든 존재와 현상이 오직 마음(識)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불교 교리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체계화한 대승불교의 한 흐름)의 저술을 남겼다. 숭제법사(崇濟法師)와 진표율사를 거쳐 고려 혜덕왕사(慧德王師)로 이어지면서 유식학(唯識學) 법상종(法相宗)의 종주(宗主)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외군의 방화로 40여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된 후, 1635년 수문대사(守文大師)가 금산사를 중건하면서 미륵과 화엄의 2원 체계로 도량을 정비하였다. 조선영조 원년 환성 지안대사(喚惺 志安大師)는 전국에서 모여든 1,400여 스님이 운집한 가운데 화엄산림(華嚴山林)을 개최하였다. 근래 들어 송월주(宋月珠. 1935 ~ 2021) 스님에 의해 미륵바로알기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대사회 활동을 통해 자비와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는 사찰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금산사는 1492년 세조의 서자 덕원군 이서(李曙)가 금산사를 불사한 기록이 있어 당시 왕실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7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호남지역 또한 의승군이 집결하였는데, 그 중심 사찰이 금산사였다. 호남의 의승군을 이끈 뇌묵 처영(雷黙 處英)은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후에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선종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았다. 뇌묵 처영대사는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과 함께 서산대사의 2대 제자로 일컬어진다. 총섭(摠攝 : 은 불교에서 승군(僧軍)을 통솔하는 최고위 승직)의 지위를 받고, 후에는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黙)’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 시기 조정에서 전국의 사찰 가운데 선교 16종 규정소(糾正所 : 조선 후기 승려의 기강을 진작하고 승풍(僧風)을 올바로 세우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기구)를 설치하였는데, 금산사는 전라우도(全羅右道) 규정소로 지정되어 도내의 여러 사찰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와 전라우도를 관할하는 규정소로 확대되었다.

1935년 3월 큰 화재로 미륵전 본존불이 전소되었다. 당시 공모전이라는 파격적인 방식(불모 일섭스님 등 당대 유명 작가 5인 응모)으로 진행되었는데 일본 동경대에서 수학하고 갓 돌아온 김복진 씨가 당선되어 복원불사가 시행되었다. 김복진은 서양조각을 공부한 근대 조각가이다. 그는 새로운 재료인 석고를 이용하면서도 전통을 계승한 미륵대불을 완성하였다. 1961년에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한 태공 월주 스님은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불사를 이루었고 여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만들어지면서 17교구의 본사로서 조계종의 종헌(宗憲)과 종지종풍(宗旨宗風)을 따르고 있다.

 

금산사 가는 길 국도변 메타스퀘이어 길
천왕문(天王門)
금강문(金剛門)
느티나무 고목과 당간지주(幢竿支柱 :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 이라 하며, 장대 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
보제루(普濟樓)
금산사 성보박물관(金山寺 聖寶博物館)

 

선시(禪詩) 1수.   - 한산자(寒山子)

一住金山萬事休(일주금산만사휴) 한 번 금산(원문:寒山)에 머무니 만사가 한가롭고

更無雜念掛心頭(갱무잡념괘심두) 더 이상 마음에 번뇌 한 점 없어라.

閑於石壁題詩句(한어석벽제시구) 석벽에 시구 쓰며 한가롭게 사니

任運還同不繫舟(임운환동불계주) 매어두지 않는 배처럼 걸림 없도다.

 

한산(寒山) 또는 한산자(寒山子)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유명한 선승(禪僧)이자 저명한 시인으로,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서 은거하며 300여 수의 선시(禪詩)를 남긴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산(寒山)은 생졸연대 미상으로 벼슬집안 가문에서 태어나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떨어졌고, 이후 승려가 되었었다. 서른 살이 된 후에는 저장성 동부 천태산에서 은둔하다가 100세가 넘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습득(拾得)과 풍간(豊干)과 함께 ‘국청삼은(國淸三隱 : 국청사에 숨어 살던 세 명의 성자(聖者)를 일컫는 이름)’ 또는 ‘삼성(三聖)’으로 불리며, 당시 불교계에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는 탈속(脫俗)의 정취가 배어있는 선시의 백미로 사찰 주련(柱聯)에 자주 등장한다.

당나라 불교와 시문학에 큰 영향을 남긴 인물로 산속의 석벽에 써둔 시들을 당시 고을의 태수였던 여구윤(呂丘胤)이 수집 정리하여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2층 용화지회(龍華之會) 현판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의 글씨. 1층 대자보전(大慈寶展) 현판은 정읍의 천재 소녀 서예가 몽련(夢蓮) 김진민(金瑱珉, 1912~1991)의 글씨.
금산사 노주(露柱) (보물 제 22호)
석련대(石蓮臺) (보물 제 23호)
육각다층석탑(六角多層石塔) (보물 제 27호)
대적광전(大寂光殿)
삼성각(三聖閣)
조사전(祖師展)
나한전(羅漢殿)
금산사 5층석탑(金山寺 五層石塔) (보물 제 25호)
금산사 방등계단(金山寺 方等戒壇) (보물 제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