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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설곡 정포 영국(雪谷 鄭誧 詠菊)

이른 새벽 백운산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길옆으로 노란 감국(甘菊)이 만개(滿開)했다. 국화의 진한 향기가 옷깃에 스며 숙소에 도착한 후에도 향기의 여운이 남아있다. 도로 주변이나 나지막한 언덕에는 온통 산국(山菊)이나 감국으로 덮여있어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감국 몇 송이를 꺾어 꽃병에 담아두면 그 향기가 오래 지속되어 정신을 맑게 할 뿐만 아니라 그윽한 향기는 숙면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흔히 산국과 감국은 구별이 어렵다고 하는데 쉽게 구별하는 방법은 꽃의 크기로 산국은 50원짜리 동전 정도의 크기며 감국은 500원 동전의 크기로 산국 보다 1.5배 크며, 감국은 향기와 단맛이 강하고 차로 많이 이용한다.

당(唐) 시인 원진(元稹)의 국화(菊花)시 마지막 구절처럼 차화개진갱무화(此花開盡更無花 : 이 꽃이 지고 나면 다시 무슨 꽃이 볼 수 있으리오)라고 했듯이 내가 가꾸는 주말농장에도 노란 국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늦가을을 상징하는 국화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대표적인 꽃 이기에 고려 후기 문인 정포(鄭誧)의 영국(詠菊)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詠菊 : 국화를 읊다)   

我愛黃金菊(아애황금국) 나는 노란 국화를 사랑하니

凌霜有光輝(릉상유광휘) 서리를 견디며 오히려 빛을 발하네.

獨立晚更好(독립만갱호) 늦가을 홀로 서 있어 더욱 좋고

孰謂孤芳微(숙위고방미) 향기가 외롭고 미약하다 누가 말하는가?

風霜雖凜冽(풍상수름렬) 바람서리 비록 차고 매서우나

亦不畏其威(역불외기위) 그 위세 또한 두렵지 않네.

足以制頹齡(족이제퇴령) 꽃을 바라보며 늙음을 잊어서 족할 뿐

匪獨救我飢(비독구아기) 내 궁핍한 삶을 구제하려는 것은 아니라네.

 

설곡 정포(雪谷 鄭誧 1309 ~ 1345) 고려 후기 전리총랑(典理摠郞),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해(鄭瑎)의 손자이다. 판선공(判繕工) 정책(鄭責)의 아들이며, 최문도(崔文度)의 사위이다.

정포는 1326년(충숙왕 13) 과거에 급제하였다. 얼마 뒤에 예문수찬으로 원나라에 표(表)를 올리러 가다가 마침 원나라에서 귀국 중이던 충숙왕을 배알 하게 되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충혜왕 때에 전리총랑(典理摠郎)에서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었다.

당시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자 상소하였다가 도리어 파면 당하였다. 이때에 어떤 이가 정포가 원나라로 망명하려 한다는 참언을 하여 끝내 울주(蔚州)로 유배당하였다. 유배 중에도 오히려 태연자약하여 활달한 장부의 기질을 잊지 않고 풍류생활을 즐겼다.

정포는 유배지에서 풀리자 다시 출세의 의지를 가지고 원나라에 건너갔다. 원나라 승상인 별가불화(別哥不花, 別哥普化)가 그를 한번 보고 매우 호감을 가지게 되어 원나라 황제에게 추천하였다.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포는 최해(崔瀣)의 문인으로 이곡(李穀) 등과 사귀며 시문과 글씨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그의 시집인 『설곡시고(雪谷詩藁)』가 전하고 있고 다수의 시가 수록된 『설곡집(雪谷集)』도 전하므로 구체적인 문학과 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현(李齊賢)이 쓴 「설곡시서(雪谷詩序)」에서 정포의 불행하였던 일생에 대하여 애석해하는 글귀들이 나타나는바, 이를 통하여 그의 인물됨과 재식(才識)의 일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색(李穡)의 「설곡시고서(雪谷詩藁序)」에서 정포의 시를 “맑아도 고고(苦孤)하지 않고, 화려해도 음탕하지 않아, 사기(辭氣)가 우아하고 심원하여 결코 저속한 글자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 하여, 높은 수준의 시경(詩境)을 성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체험을 품격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노란 국화)

황국
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