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가 실감 나게 다가오는 아침이다. 어제 내린 비 탓인지 오늘 아침 온도가 20도를 가리키며 모처럼 시계(視界)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길게 여름 밤을 지배했던 열대야는 가을 전령사(傳令使)들의 우렁찬 소리에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하얀구름과 나뭇잎도 가을 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 다가옴을 느끼게 하는 상큼한 날씨다.
머지 않아 겨울이 찾아오면 지나간 가을을 회상하듯, 1200여년전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 또한 가을을 회상하는 시를 남겨 오늘의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한유(韓愈)의 추회시(秋懷詩) 11수는 806년 9월 당나라 작가 한유가 쓴 5언절구(五言絶句)로, "한유문집(韓愈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한유가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쓰였으며, 그의 자기 경계와 내면에 품고 있는 작자의 심경이 제대로 표현한 작품으로 가을에 대한 감회를 읊은 연작형식(連作形式)의 시이다.
시 전체는 가을바람, 차가운 매미, 흰 이슬 등의 가을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전개되며, '텅 빈 침상에 혼자 앉아 있다', '추운 밤에 노래하는 곤충' 등의 장면을 통해 덧없는 삶과 파란만장한 생애에 대한 자신의 처지와 고민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슬픈 가을 주제의 틀을 깨고 계절의 변화와 함께 유교적 도덕 수양의 두 가지 차원에서 삶의 의지와 삶의 철학을 통합하는 독특한 시적 영역으로 풀어냈으며, 학자가 가지는 시의 미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로서의 문학의 기법을 사용하여 중당(中唐)의 문학 및 문화적 변화 추세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품고 있던 사상적 깊이와 함께 심오하게 다가오는 작자의 시상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명시를 함께 살펴보고자 총 11 수중 첫 번째 한 수를 살펴보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며 오늘 새벽 영종 백운산에서 바라본 풍경을 사진과 함께 올려보았다.
秋懷詩(추회시 : 가을의 회포를 읊다) - 其一.

窗前兩好樹(창전량호수) 창 앞에 두 그루 아름다운 나무
衆葉光薿薿(중엽광의의) 많은 잎이 무성하게 우거졌구나.
秋風一拂披(추풍일불피) 가을바람 불어 날려버리니
策策鳴不已(책책명불이) 바스락 소리 그치지 않네.
微燈照空床(미등조공상) 희미한 등불은 빈 침상을 비추고
夜半偏入耳(야반편입이) 밤이 깊도록 새삼스레 귓전을 울리네.
愁憂無端來(수우무단래) 근심 걱정 까닭 없이 일어
感歎成坐起(감탄성좌기) 감탄하며 일어나 앉았네.
天明視顏色(천명시안색) 날이 밝아 얼굴빛 살펴보니
與故不相似(여고불상사) 옛날과 같지 않네.
羲和驅日月(희화구일월) *희화(羲和)가 해와 달 싣고 달리니
疾急不可恃(질급불가시) 빨리 달려 의지할 수 없다네.
浮生雖多塗(부생수다도) 덧없는 인생 비록 나아갈 길 많으나
趨死惟一軌(추사유일궤) 죽는 것은 오로지 한 길이라네.
胡為浪自苦(호위랑자고) 어찌하여 분별없이 스스로 괴로워하는가
得酒且歡喜(득주차환희) 술잔을 들고 다시 한번 즐겨보세.
*희화(羲和 : 중국 신화의 태양의 신. 제왕 제곡(帝嚳)의 첫 번째 아내)
한유(韓愈, 768 ~ 824)는 중국 당(唐)을 대표하는 문장가·정치가·사상가이다.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자(字)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등주(鄧州) 하내군(河內郡) 남양(南陽 : 지금의 하남 성 맹주 시) 출신이나, 그 자신은 창려(昌黎 : 하북성(河北省)) 출신으로 자처했다.
한유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잃었다. 3세에 아버지를, 14세에 형 한회(韓會)를 잃고 형수 정 씨에 의해 길러졌다. 7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한 한유는 13세에 문장에 재능을 보였다. 정원(貞元 : 785 ~ 805. 당나라의 제9대 황제인 덕종 이괄이 785년부터 805년까지 사용한 연호) 2년(786년)부터 장안에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이렇다 할 문벌도 뒷배경도 없었던 그는 세 번이나 낙방하고서 8년(792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다시 이부시(吏部試)에 응시하였을 때에도 다시 세 번이나 낙방한 그는 정원 11년(795년) 세 번이나 재상에게 글을 올리고서야 가까스로 천거된다.
정원 12년(796년) 변주(汴州) 선무군(宣武軍)에서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동진(董晉)을 따라 부임하여 관찰추관(觀察推官)을 맡아 지내는 동안에 시인 맹교(孟郊)와 서로 교유하였고, 이고(李翱), 장적(張籍)이 그 문하에 들었다. 동진이 죽은 뒤에는 무령절도사(武寧節度使) 장건봉(張建封) 휘하로 옮겨 절도추관(節度推官)이 되었다가, 장건봉이 죽은 뒤 낙읍(洛邑)으로 옮겨 살았다.
정원 17년(801년)에 국자감(國子監)의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고, 이듬해 《사설(師說)》을 지었다. 19년(803년)에는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는데, 이때 관중(關中)에서 대화재가 일어난다. 한유는 《어사대상론천한인기장(御史臺上論天旱人饑狀)》을 지어 당시의 경조윤(京兆尹) 이실(李實)의 폭정을 규탄하지만, 거꾸로 자신이 연주(連州) 양산현(陽山縣) 현령으로 좌천되고, 1년이 지나자 조카 노성(老成)을 잃었다. 이때 그가 지은 글이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이다. 원화 6년(811년)에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진학해(進學解)」를 지었다. 당시의 재상 배도(裴度)는 이에 대한 치하로서 그를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삼았으며, 원화 10년(815년)에는 배도를 따라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 토벌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며, 이때 『평회서비(平淮西碑)』의 글을 짓는다.
원화 14년(819년) 정월,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던 헌종 황제는 당시 30년에 한 번 열리며 공양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여 신앙을 모으고 있던 봉상(鳳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법문사(法門寺)의 불사리가 헌종(憲宗)를 장안의 궁중으로 들여 공양하고자 하였다. 반불주의자인 그는 이듬해 「불골을 논하는 표(諫迎佛骨表)」를 헌종에게 올려 과거 양 무제(梁武帝)의 고사를 언급하며 "부처는 믿을 것이 못된다(佛不足信)"고 간언 했고, 헌종은 대노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재상 배도와 최군(崔羣)의 간언으로 사형을 면한 채 조주자사(潮州刺史, 조주는 지금의 광동성)로 좌천당했다.
이듬해 헌종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어 국자제주(國子祭酒=대학 학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병부시랑(兵部侍郞), 이부시랑(吏部侍郞), 경조윤 겸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부시랑으로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한이부(韓吏部)」로 불렀다고 한다.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사후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다. 송의 원풍(元豐) 연간에 창려백(昌黎伯)으로 추증되었다.
(영종도 백운산 풍경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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