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하면 떠오르는 명소가 죽서루(竹西樓)다. 죽서루는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성내동 죽서루길 37에 있는 누각(樓閣)으로 관동팔경(關東八景)중 하나로 그 앞을 지나는 오십천(五十川)과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나 예로부터 명승지(名勝地)로 이름이 높았다.
죽서루는 1963년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삼척 죽서루와 오십천(三陟 竹西樓와 五十川)'이라는 명칭으로 명승 제28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2023년 12월 28일,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와 함께 국보로 승격되었다.
건축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말 이승휴(李承休)의 동안거사문집(動安居士文集)에 의하면 고려 원종 7년(1266)에 이승휴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해 그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 태종 3년(1403) 삼척부의 수령(首領)인 김효손(金孝孫)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각 동쪽의 죽상사(竹上寺)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인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집을 따와 죽서루(竹西樓)라 하였다고 전한다.
삼척시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을 내려다보며 벼랑 위에 서 있는 죽서루는 자연 암반을 초석 삼아 높고 낮게 기둥을 세워서 그 자체로 자연의 일부라 여겨질 만큼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다.
이곳은 송강 정철(松江 鄭澈), 미수 허목(眉叟 許穆) 등 고려와 조선 통틀어 이름난 문인이나 정치인들이 여기에 들러 글솜씨를 과시하고 갔음을 알 수 있다. 미수 허목은 부사 시절 ‘제일계정(第一溪亭)’ 현판과 중수기(重修記)를 남겼다.
죽서루 옆 조선 시대에는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주관(眞珠觀)의 부속건물이었으며 지방에 파견된 중앙관리들이 묵던 숙소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향연이 펼쳐지던 곳이다. 진주(眞珠)는 삼척의 옛 지명이다.
죽서루 시판(詩板)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명 시인묵객, 화가들이 죽서루에 올라 그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하고 시를 새긴 판을 누각에 걸었다. 그들이 남긴 시판의 흔적을 사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삼척 죽서루와 오십천 (三陟 竹西樓와 五十川)


안으로 들어서면 우람한 누각(樓閣)이 위용을 자랑한다. 전면에는 방문객을 맞는 두 개의 유연한 행서체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이다. 이곳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숙종 때 삼척부사 이성조(李聖肇)가 1710년(숙종 36년) 편액 했다고 한다.

건물은 이층인데 실제로 아래층이 있는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언덕 비탈을 살려 이층 하나만을 쓸 수 있게 한 누각(樓閣)이다. 땅의 높낮이가 다를 때 이를 평평히 고르지 않고 그 자리에 따라 초석(礎石)을 놓고 그 높이에 따라 기둥 길이를 다르게 하여 짓는 건축법이다. 이를 그랭이 공법이라 한다는데 우리나라 사찰의 많은 누각이 이렇게 지어졌다.

누각으로 오르는 사다리는 따로 없다. 건물 옆 언덕 바위로 오르면 누각 마루에 오를 수 있다. 이런 지형에 세운 건물이다 보니 아래층 기둥은 17개, 위층 기둥은 20개라 한다. 입구도 앞쪽은 3칸, 뒤쪽은 두 칸이라 한다. 설명을 듣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인데 변화가 재미있다.

누각 마루에 올라서면 넓고 넓은 대청마루 곳곳마다 편액이 걸려 있다. 정면에 걸려 있는 단아한 해서체의 죽서루(竹西樓)는 누구의 글씨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현종 때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第一溪亭(제일계정)과 헌종 때 부사를 지낸 이규헌(李奎憲)의 海仙遊戱之所(해선유희지소: 바닷가 신선이 노는 곳)가 글씨의 멋을 자랑한다. 기둥과 공간마다 시문(詩文)을 적은 편액들이 빽빽한데 죽서루 안내자료에 따르면, 죽서루 및 그 별호(別號)를 새긴 편액이 5개, 시를 쓴 편액이 17개, 기문(記文)을 쓴 편액이 6개다. 이 밖에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 및 기부금방명기(寄附金芳名記)를 쓴 편액이 1개씩 있고 비록 시를 쓴 편액은 17개이지만 내용은 28편의 시가 쓰여 있다 한다.

1789년(정조 13) 정조대왕은 죽서루를 정말 보고 싶어 해서 김홍도에게 그림을 그려오라고 시켜 김홍도가 바친 죽서루 그림을 보고 "삼척 태수는 뉘 집 아들이기에 매일 아름다운 곳에서 풍류를 즐기느냐" 하고 부러워하며 다음과 같은 어제(御製) 시 한 편을 내렸다.
정조 어제시(正祖 御製詩)
彫石鐫崖寄一樓(조석전애기일루) 돌을 쪼고 절벽 깎아 누각 하나 세웠구나
樓邊滄海海邊鷗(누변창해해변구) 누각 옆에는 푸른 바다, 해변에는 갈매기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삼척고을 태수는 어느 집의 아드님이신가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복야유) 미녀 가득 싣고 밤새워 노는구나.
숙종이 죽서루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없으니 화원의 그림을 보았거나 누구의 시문을 읽고 감회가 일었을 것이다. 마침 삼척부사로 와 있던 이상성(李相成)이 이 시를 편액하고 그 사유를 걸었다.
先大王御集中 有關東八景詩 竹西樓卽其一也 今於刊布之日 以臣相成曾經侍從 亦與宣賜之恩 臣適守玆土 奉讀遺韻益不勝摧項之忱 玆敢鋟梓懸揚 與子平陵察訪臣光遠 續題其後 以寓哀慕之誠焉. 崇禎紀元後九十四年辛丑五月日.
선대왕(숙종)의 문집 중에 관동팔경을 노래한 시가 있는데 ‘죽서루’도 곧 그중 하나다. 지금 선대왕의 문집을 간행하여 배포하는 날을 맞이하여 나 상성(相成)이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냈다고 하여 또한 문집을 하사해 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데, 내가 마침 삼척부사여서 선대왕이 남긴 그 시를 받들어 읽으니 더욱더 목이 메는 심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감히 판목에다 새겨 높이 걸고는 내 아들 평릉(平陵) 찰방(察訪) 광원(光遠)과 더불어 그 뒤에다 몇 자 적어 슬퍼하며 사모하는 정성을 나타냈다. 숭정 기원 후 94년(1721년) 5월에 쓰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 ~ 1682) 조선 중기 삼척부사를 역임시절 죽서루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미수기언((眉叟記言)에 있는 죽서루기(竹西樓記)의 편액내용을 살펴보면..

죽서루기(竹西樓記)
東界多名區。其絶勝八。如通川叢石亭,高城三日浦海山亭,䢘城永郞湖,襄陽洛山寺,溟州鏡浦臺,陟州竹西樓,平海越松浦。遊觀者獨稱西樓爲第一。何也。
"관동 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다. 그중에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이니, 즉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와 해산정(海山亭), 수성(䢘城)의 영랑호(永郞湖),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 명주(溟州)의 경포대(鏡浦臺), 척주(陟州)의 죽서루, 평해(平海)의 월송포(越松浦)인데, 관광하는 자들이 유독 죽서루를 제일로 손꼽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蓋濱海州郡關嶺以外。東盡大海。其外無窮。日月迭出。怪氣萬變。海岸皆沙。或匯爲大澤。或矗爲奇巖。或鬱爲深松。自習溪以北。至箕城南境。七百里。大體皆然。
대개 해변에 위치한 주군(州郡)들이 대관령(大關嶺) 밖은 동으로 큰 바다를 접했으므로 그 바깥은 끝이 없으며, 해와 달이 번갈아 떠올라 괴이한 기상의 변화가 무궁하다. 해안은 모두 모래톱인데, 어떤 데는 모롱이진 큰 소[大澤], 또 어떤 데는 불거진 기이한 바위, 그리고 또 어떤 데는 우거진 깊은 솔밭으로 되어 있어, 습계(習溪) 이북으로 기성(箕城) 남쪽 접경까지 7백 리는 대체로 다 이러하다.
獨西樓之勝。隔海有高峯峭壁。西有頭陀,太白。巍峨巃嵸。浮嵐積翠。巖岫杳冥。大川東流。屈折爲五十瀨。間有茂林墟煙。
유독 죽서루의 경치만이 동해와 마주하여 높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벼랑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두타산(頭陀山)과 태백산(太白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짙은 이내 속으로 바위너설이 아스라이 보인다. 큰 시내가 동으로 흘러 꾸불꾸불 50리의 여울을 이루었고, 그 사이에는 울창한 숲도 있고 사람 사는 마을도 있다.
至樓下。層巖蒼壁千尋。淸潭脩瀨。灣洄其下。西日。綠波潾潾。澹灎巖壁。別區勝槩。與大海之觀絶殊。遊觀者其樂此而云云者耶。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 맑은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녘이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별구(別區)의 아름다운 경치는 큰 바다의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 관광하는 자들도 이런 경치를 좋아해서 일컫는 것이 아닌가 싶다.
考官府故事。樓不知作於何代。而至皇明永樂元年。府使金孝宗。修廢墟起此樓。洪煕元年。府使趙貫。施丹雘。其後四十六年成化七年。府使梁瓚。重修之。嘉靖九年。府使許確。增作南檐。
이 고을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아도 누를 어느 시대에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명(皇明)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 3)에 부사(府使) 김 효종(金孝宗)이 폐허를 닦아 누를 세웠고, 홍희(洪煕) 원년(1425, 세종 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올렸다. 그 뒤 46년인 성화(成化) 7년(1471, 성종 2)에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했고, 가정(嘉靖) 9년(1530, 중종 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중축했다.
又其後六十一年萬曆十九年。府使鄭惟淸。復重修之。自太宗永樂元年癸未。至淸主康煕元年壬寅。爲二百六十年。樓下。古有竹藏古寺。樓有竹西之名。蓋以此云。仍誌之。以爲竹西樓記。
또 그 뒤 61년인 만력(萬曆) 19년(1591, 선조 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太宗) 영락 원년 계미(1403)에서부터 청주(淸主) 강희(康煕) 원년 임인(1662, 현종 3)까지는 260년이 된다. 옛날에 누 밑에 죽장사(竹藏寺)란 절이 있었는데, 누 이름을 죽서라고 부른 것은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이상을 기록하여 죽서루기로 삼는다."
죽서루 시판(詩板)


삼척 하면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지은 이승휴(李承休)이다. 그는 매사냥에 빠진 충렬왕과 그 주변 인물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간(諫)하다가 파직되어 어머니의 친정 고향 삼척 땅, 두타산 흑악사(黑岳寺, 天恩寺)에 은거해 제왕운기를 썼다. 단군을 우리나라 시조로 시작하는 역사책이다.
등진주죽서루차판상운(登眞珠竹西樓次板上韻 : 죽서루에 올라 詩板의 시에 차운하다) - 이승휴(李承休)


半空金碧駕崢嶸(반공금벽가쟁영) 높은 하늘 고운 색채 높고 험준함을 더하는데
掩映雲端舞棟楹(엄영운단무동영) 햇빛 가린 구름조각 용마루와 기둥에서 춤추는구나.
斜倚翠岩看鵠擧(사의취암간곡거) 푸른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날아가는 고니 바라보고
俯臨丹檻數魚行(부림단함수어행) 붉은 난간 잡고 내려다보며 노니는 물고기 헤아려보네.
山圍平野圓成界(산위평야원성계) 산은 들판을 빙 둘러싸 둥그런 경계를 만들었는데
便欲投簪聊送老(편욕투잠료송로) 이 고을은 높은 누각 때문에 매우 유명해졌구나.
縣爲高樓別有名(현위고루별유명) 모든 벼슬 버리고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지만
庶將螢燭助君明(서장형촉조군명) 작은 힘이나마 보태 임금 현명해지기를 바라네.
동안거사 이승휴(動安居士 李承休, 1224 ~ 1300)는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다. 경산부 가리현(京山府 加利縣) 사람으로 자는 휴휴(休休),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다. 본관은 가리(加利)로, 가리이씨(加利李氏) 의 시조다.
그는 9세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세에 신서(申諝) 밑에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주역(周易)》을 익혔다. 14세에 아버지 상을 입고 대부경(大僕卿) 임천부(林天敷)의 아내인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 밑에서 양육되었다.
그 후 몽골의 고려 침입으로 고려 정부가 천도(遷都)한 강화도로 들어가서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우 관계를 맺게 된다. 29세가 되는 1252년(고종 39년)에 과거 시험에 급제했다. 과거 급제 후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했으나, 몽고의 침입으로 환도하지 못하고 두타산 구동(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1273년(원종 14년) 원나라에서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한 사실을 알려오자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했다. 원나라에서 올린 그의 표문(表文)은 원 세조(世祖)와 낭리(郎吏)들의 탄복을 받았다. 동행했던 송송례(宋松禮)도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라고 탄복했다.
귀국 후 벼슬이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가 되었다. 하지만 탐관오리 7명의 죄상을 밝혀 가산을 몰수한 일로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으며, 이 시기에 동안거사(動安居士)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
1280년(충렬왕 6년)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된 이승휴는 감찰시사(監察侍史) 심양(沈諹), 잡단(雜端) 진척(陳倜), 시사(侍史) 문응(文應) 등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 조로 간언(諫言)했다가 파직되었다.
그 후 한동안 벼슬을 떠나 용안당(容安堂)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다.
1300년(충렬왕 26년) 10월 2일(양력 11월 13일)에 77세를 일기로 고단한 생을 마쳤다.
성질이 정직해 세상 사람과 달리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죽서루차운(竹西樓次韻) -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

誰將天奧敞華樓(수장천오창화루) 누가 하늘 도와 아름다운 누각을 세웠는가
石老星移不記秋(석로성이불기추) 지나온 세월 얼마인지 알 수가 없구나.
野外千鬟浮遠岫(야외천환부원수) 들판 저 멀리 산봉우리에 검푸른 빛 서려있고
沙邊一帶湛寒流(사변일대잠한류) 모래사장 부근에는 차가운 물 고여있네.
騷人自是多幽恨(소인자시다유한) 시인은 본래 남 모르는 한이 많다지만
淸境何須惹客愁(청경하수야객수) 청경에서 어찌 나그네의 근심을 일으켜야만 하리오.
會撥萬緣携籊籊(회발만연휴적적) 온갖 인연 떨쳐버리고 긴 낚싯대 들고
碧崖西畔弄眠鷗(벽애서반롱면구) 절벽 서쪽 물가에서 졸고 있는 갈매기와 놀아보리.
송강 정철 가사의 터(담양 식영정의 석비와 같은 형태로 세움)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은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그는 내금강과 외금강, 관동팔경을 유람한 뒤, 조선 가사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다.

竹西樓(죽서루) -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7~1594)

關東仙界陟州樓(관동선계척주루) 관동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척주의 누각
虛檻憑危夏亦秋(허함빙위하역추) 빈 난간에 위태로이 기대니 여름 또한 가을 같구나.
天上玉京隣北左(천상옥경인북좌) 하늘 위 옥황상제 궁전이 북쪽 왼편에 이웃해 있고
夢中銀潢聽西流(몽중은황청서류) 꿈속에서 은하수 서쪽으로 흐르는 소리 들리네.
疏簾欲捲露華濕(소렴욕권로화습) 성긴 주렴 걷으려 하니 영롱한 이슬에 젖어있고
一鳥不飛江色愁(일조불비강색수) 새 한 마리 날지 않으니 강물 빛은 수심에 잠겼네.
欄下孤舟將入海(난하고주장입해) 난간 아래 외로이 떠있는 배 바다로 들려하는데
釣竿應拂鬱陵鷗(조간응불울릉구) 낚싯대 던지니 놀란 갈매기 울릉도로 날아가네.
차 죽서루판상운(次 竹西樓板上韻) - 삼척부사 심영경(沈英慶)

關東第一竹西樓(관동제일죽서루) 관동에서 제일가는 죽서루
樓下溶溶碧玉流(누하용용벽옥류) 누각 아래 푸른 물 도도히 흐르는구나.
山靜鳥啼叢桂樹(산정조제총계수) 산은 고요한데 계수나무 숲 속에서 새소리 들리고
月明人語木蘭舟(월명인어목란주) 달은 밝은데 목란 배에서는 이야기 소리 들리네.
百年泉石如相待(백년천석여상대) 오랜 세월 물과 돌이 어우러진 이 경치
千古文章不盡遊(천고문장부진유) 천고의 문장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도다.
采采瓊華生遠思(채채경화생원사) 풍성한 아름다운 꽃들 옛 추억 생각나게 하는데
白雲歸駕故掩留(백운귀가고엄류) 떠가던 흰 구름 도리어 오래 머무르네.
(죽서루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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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도호부 관아 진주관(객사) (三陟 都護府 官衙 眞珠觀(客舍))

객사는 2010~2016년 죽서루 주변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옛 삼척도호부 관아지. 2021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됨에 따라 삼척시에서는 관아를 2023년에 복원하였다.
경차석천(敬次石川 : 삼가 석천의 시를 차운하다) - 신암 이준민(新菴 李俊民)

天地無心客(천지무심객) 속세의 일에 얽매이지 않는 나그네요
江湖有約人(강호유약인) 자연 속에 살기를 기약한 이 몸이라지만.
斜陽樓百尺(사양누백척) 저녁 해에 죽서루 우뚝 솟았음을 보니
虛送故園春(허송고원춘) 고향의 봄 그리며 헛 세월만 보내고 있구나.
신암 이준민(新菴 李俊民. 1524 ~ 1590)은 조선 전기에, 경기관찰사, 공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 이건(李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윤(李貞胤)이고, 아버지는 참봉 이공량(李公亮)이며, 어머니는 조언형(曺彦亨)의 딸이다. 영남의 대학자인 조식(曺植)이 그의 외숙이다.
1549년(명종 4) 식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정자(弘文館定字)에 제수되고, 1554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재임 시 당시의 공허한 사장(詞章) 중심의 문풍(文風)을 경계하고, 경학을 장려해 덕행을 권장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 뒤 1556년 황해도사로서 중시에 급제한 뒤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올랐다.
이듬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어서는 김진(金鎭) · 이명(李銘) 등과 함께 당시의 권신인 이량(李樑)에 의부해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축출하니, 사람들이 간사하다고 지목하였다.
반대파의 미움을 사서 영월군수로 좌천되었고, 이어 1561년 강릉대도호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관할구역인 대창역(大昌驛)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그 뒤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서 세자 교육에 힘쓰다가 강계부사(江界副使)를 지냈다. 선조가 즉위하자 승정원(承政院)으로 자리를 옮겨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고, 1570년(선조 3)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가 되어 오랫동안 국방을 담당하였다.
그 뒤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1575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가 북방을 잘 다스렸다. 그 뒤 내직으로 옮겨 병조판서(工曹判書) ·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지냈는데, 특히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일을 잘 처리했다.
이때 조정의 공론이 분열해 동인 · 서인의 붕당(朋黨)이 일어나자 이를 매우 염려했고, 당론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를 존경하였다. 1584년 이이가 사망하자, 당인들이 그를 탄핵해 공격하니, 이에 맞서 강경하게 불가함을 주장하는 의기를 보였다.
천품(天稟)이 강직해 사리에 맞지 않으면 승복하지 않았다. 항상 검소했고, 자제 교육에도 매우 엄했다. 붕당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 되었고, 시호는 효익(孝翼)이다.
竹西樓(죽서루) 억심동로(億沈東老 : 심동로를 생각하며) - 이구(李球)


三陟官樓是竹西(삼척관루시죽서) 삼척 지방 누각 하면 곧 죽서루인데
樓中佳客沈中書(루중가객심중서) 누각 안의 가객(佳客)은 심중서(沈中書)로구나.
如今白首能詩酒(여금백수능시주) 지금은 흰머리 노인이지만 시를 짓고 술을 마실 수 있으니
暇日相遊爲說予(가일상유위설여) 한가한 날 어울려 놀며 나와 이야기나 나누어 보겠는가.
竹西樓(죽서루) 억최복하(億崔卜河 : 최복하를 생각하며) - 이구(李球)

鳳池司諫臥仙槎(봉지사간와선사) 신선이나 타는 뗏목에 누워 쉬고 있는 중서성(中書省) 사간(司諫)은
早知滄浪漁父歌(조지창랑어부가) 일찍이 창랑(滄浪)의 어부가(漁父歌)를 알았구나.
爲說塩梅時所急(위설염매시소급) 말하건대 임금을 도와 선정을 베풀게 하는 것이 지금의 급한 일이니
天廚鼎味待君和(천주정미대군화) 임금이 정치를 함에 그대가 나와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 ~ 1882)는 종실(宗室 : 임금의 친족)로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조부로,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구(球). 아버지는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 병원(秉源)이며, 아들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인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 진(恩信君 禛)에게 입양하여 남연군에 봉해졌다. 부인은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1771년(영조 47) 양부 은신군이 김구주(金龜柱) 등의 모함으로 관작(官爵)을 빼앗기게 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 중죄인에 해당하는 형벌로서 가시나무 대신으로 쓴 탱자나무는 전라도에 많았으므로 이 형을 받은 사람은 대개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보내졌음)된 뒤 변사하자 불우한 처지에 놓였으나, 1815년에 수원관(守園官), 1821년에 수릉관(守陵官) 등 말단직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충청도 덕산(德山)에 묻혔는데, 1868년(고종 5) 묘가 독일인 오페르트(Oppert,E.J.) 등에 의하여 도굴당하자 흥선대원군의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 쇄국정책(鎖國政策)을 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처음 시호는 영희(榮僖), 뒤에 충정(忠正)으로 개시(改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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