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팔선 회도인 여동빈(中國 八仙 回道人 呂洞賓) 詩 몇 首
중국 8선(八仙) 회도인 여동빈(回道人 呂洞賓 796~미상) 원명은 여암(呂嵒 또는 巖)이고 자는 동빈(洞賓)이며 호는 순양자(純陽子)이다.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12년(796) 음력 4월 14일, 영락현(永樂縣) 초현리(招賢里 :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예성현(芮城縣) 영락진永樂鎭))에서 태어났다. 도교의 *팔선(八仙) 가운데 한 명이며 전진파(全眞派) 북오조(北五祖)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또한 자칭 여(呂)자의 입구(口)자 두자를 합쳐 회(回)로 하여 회도인(回道人)으로 불렀다.
여동빈은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선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행으로 오늘날까지 인기가 높다. 중국 팔선(八仙) 중 한 명인 종리권을 만나 득도하였으며 50세에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검술 또한 능하여 검선(劍仙)으로도 불리며 중국 무협지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며, 게임의 캐릭터, 신선도(神仙圖)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중국인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신선으로 후대를 거치면서 다소 과장이 가미된 부분도 많으리라 생각되며, 여동빈의 일화와 함께 기행을 살펴보고자 그가 남긴 시와 스승인 종리권(鍾離權), 후대 소동파(蘇東坡)와 관련된 시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팔선(八仙) : 여동빈(呂洞賓), 종리권(鍾離權), 한상자(韓湘子), 장과로(張果老), 이철괴(李鐵拐), 하선고(何仙姑), 남채화(藍采和), 조국구(曹國舅)
自詠登樓(자영등루 :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스스로 읊다)
獨上高樓望八都(독상고루망팔도)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팔방을 바라보니
墨雲散盡月輪孤(묵운산진월륜고) 검은 구름 흩어지고 둥근 달만 중천에 외롭게 떠있다.
茫茫宇宙人無數(망망우주인무수) 망망한 우주에 사람은 많고도 많은데
幾個男兒是丈夫(기개남아시장부) 사내대장부라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동빈이 46세 과거시험 낙방 후 장안 술집에서 선인(仙人) 종리권을 만나게 되는데, 사리사욕이 없고, 온화함이 넘치는 듯한 그 노인의 풍모는 여동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마주하여 술잔을 권하면서 종리권(鍾離權)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시를 읊게 된다.
坐臥常携酒一壺(좌와상휴주일호) 앉으나 누우나 언제나 한 호로의 술을 가지고 다녔고
不敎雙眼識皇都(불교쌍안식황도) 두 눈으로는 황도(세상일)의 일을 모르도록 했다네
乾坤許大無名姓(건곤허대무명성) 하늘과 땅은 이렇게 큰데 성도 이름도 없이
疏散人間一丈夫(소산인간일장부) 한낱 인간세상을 떠도는 한 사내일 뿐일세. (종리권)
여동빈은 시를 음미해 보고는 노인의 시풍이 표일(飄逸)하고 호방함을 깊이 찬탄 하며, 종리권에게 詩로 화답하다.
贈鍾離雲房(정종리운방 : 雲房仙人 종리권에게 시를 지어드리다)
生在儒家遇太平(생재유가우태평) 유가 집안에 태어나 태평시대를 만났건만
懸纓垂帶布衣輕(현영수대포의경) 갓 끈을 걸어두고 허리띠를 벗어 놓았으니 삼베옷이 가볍다(벼슬하지 않은 포의를 비유)
誰能世上爭名利(수능세상쟁명리) 누가 세상과 더불어 명예와 이익을 다투겠는가?
欲侍玉皇歸上淸(욕시옥황귀상청) 옥황상제를 모시러 상청경으로 되돌아갈까 한다.
종리권은 여동빈의 시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본 후 크게 기뻐하면서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며 여동빈은 종리권에게 절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여동빈은 황룡산(黃龍山)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절에는 당시 이름을 떨치던 유명한 황룡선사를 만나 불법 배우게 된다. 황룡선사의 "먼저 마음속에는 물건(욕심)이 없어야만(先要心中無物) 바야흐로 삼라만상을 감싸 안을 수 있다(方能包羅萬象)"는 한마디에 크게 깨달아 즉석에서 오도송을 지었다.
여동빈 오도송(悟道頌)
棄却瓢囊擊碎琴(기각표낭격쇄금) 하나있는 표주박 주머니도 버리고, 거문고도 깨뜨려 버렸다
從今不戀汞中金(종금불연홍중금) 이제부터 불사약(금단)에 더는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네
自從一見黃龍後(자종일견황룡후) 이제 황룡선사를 한번 만나본 후
始覺當年錯用心(시각당년착용심) 비로소 그 당시 마음 잘못 쓴 것을 깨달았다네
이후 세상에서 백여 세까지 지내다가 무창 황학루(黃鶴樓) 3층 누각 위에서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한다. 신선이 된 후 여동빈은 걸핏하면 인간 세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역대로 그가 인간 세상에 와서 놀다가 세상과 사람을 제도한 전설이 너무 많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에는 구전으로 내려오거나 열전으로 후대에서 가미한 요소가 많아 실체적 진위를 떠나 일화로 전해지는 내용이 많다. 그 중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송(宋) 경력 4년(1044년), 등자경(滕子京)은 중앙 정치무대에서 쫓겨나 파릉군 태수가 되었다. 부임한 다음 해 그가 다스리던 파릉군은 정치를 잘하여 백가지 폐단이 바로 서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때 등자경은 당나라 때 연국공 장열(張說)이 세웠던 악양루가 낡아 보수를 하였다. 악양루 보수가 끝난 날 큰 잔치를 열었다. 연회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데 등자경은 문득 이름만 적힌 명첩 하나를 받았다. 그 위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고 다만 "화주(華州)도사가 삼가 문후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등태수는 사람을 보내 그 도사를 악양루 위로 올라오게 하였다. 얼굴을 보니 긴 수염이 가슴까지 드리웠고 등 뒤에는 장검을 메고 있는데 그 모습이 청수하고 기이한 도사였다. 도사는 누각 위로 올라와 등태수와 마주하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아 호쾌하게 술을 마시고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좌중을 압도하였다.
악양루 중창 경축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술에 취한 후 각자 붓을 들고 시와 글을 짓기 시작했다. 화주도사 또한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三醉岳陽(삼취악양 : 악양루에서 세 번 취하다)
朝游東海暮蒼梧(조유동해모창오) 아침에 동해에서 놀다가 저물어 창오군(광서성)으로 가니
袖裏靑蛇膽氣粗(수리청사담기조) 소매 속 들어있는 단검(푸른 뱀)은 담력과 기력이 더욱 호쾌하다.
三醉岳陽人不識(삼취악양인불식) 악양루에서 크게 세 번 취했으나 사람들은 나를 모르는데
郞吟飛過洞庭湖(랑음비과동정호) 낭랑히 시를 읊으면서 동정호를 날아서 지나갔다.
등자경은 화주도사의 시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그 자리에 있던 화공에게 화주도사의 취한 모습을 급히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등태수는 친히 예를 취하면서 나아가 화주도사에게 성명을 물었다. 화주도사는 이미 모든 것을 알려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성은 "여(呂)"요 이름은 "암(嵓)"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마치고 큰 소리로 웃으면서 작별을 고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등자경과 그 자리에 있던 문사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그 도사가 당나라 때의 유명한 회도인 여동빈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일화를 기리기 위해 이 악양루 우측에는 삼취정(三醉亭)이 세워져 있다. 이 삼취정은 청나라 건륭 40년(1775년)에 세워졌고, 그곳에는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모양의 여동빈 상과 그가 쓴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한 여동빈은 중생들이 명리재색(名利財色)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헛되이 죽음으로 가는 것은 경계한 듯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후학을 경계하게 하였다.
純陽呂祖詩(순양여조시 : 순양 여동빈 읊다)
人身難得道難明(인신난득도난명)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도 밝히기도 어려워라
塑此人心訪道根(진차인심방도근) 사람마음 따라 도의 뿌리를 찾나니
此身不向今生度(차신불향금생도) 이 몸을 이 생애에 제도하지 못하면
再等何時度此身(재등하신도차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하리오
그의 시 가운데 유명화가 화제시(畵題詩)와 문인들에게 회자되며,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등장하는 시구(詩句)가 있는데 여동빈이 남긴 시중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내용으로 回先生過湖州東林沈氏(회선생과호주동림심씨 : 회 선생이 호주 동림의 심씨네 집에 들러) 回山人 詩云(회산인 시운 : 회산인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시는 교훈적 요소가 많이 담겨 있다.
題沈東老壁(제심동로벽 : 심 씨 동로 댁에서 제하다)
西鄰已富憂不足(서린이부우부족) 이웃집은 부자인데도 모자라서 걱정인데
東老雖貧樂有餘(동로수빈낙유여) 동로 댁은 가난해도 여유 있어 즐겁네
白酒釀來因好客(백주양래인호객) 술 빚어내는 것은 손님 맞기 위해서고
黃金散盡爲收書(황금산진위수서) 가진 돈 다 쓰는 것은 책 모으기 위해서라네
명시 답게 소동파가 이에 답시(答詩)남겼는데 기록 시기는 여동빈과 약 300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함께 그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東坡居士 和云(동파거사 화운 : 동파가 이에 화답하여)
世俗何知貧是病(세속하지빈시병) 어째서 세속에서는 가난을 병이라 하고
神仙可學道之餘(신선가학도지여) 신선은 도의 여유를 배울 만하다고 하나
但知白酒留佳客(단지백주류가객) 내 아는 건 술은 좋은 객을 머물게 하고
不問黃公覓素書(불문황공멱소서) 책 사는 데 돈 따위는 묻지도 않고 쓴다는 것
송(宋) 신종(神宗) 희령(熙寧) 원년(1068) 8월 19일, 한 도인이 심동로((沈東老) : 심사(沈思) 자는 지정(持正), 호는 동로(東老))의 집에 들러 술을 마시고 석류 껍질로 집안 동로암(東老菴) 벽에 “西隣已富憂不足, 東老雖貧樂有餘. 白酒釀來因好客, 黃金散盡爲收書.”라는 시 한 수를 남겼는데 스스로를 회산인(回山人)이라고 했다. 동로가 그를 문밖까지 따라나가 배웅했는데 돌다리를 건너더니 홀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당시에는 그가 여동빈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진릉(晉陵)에 들렀을 때, 동로의 아들 해(偕)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들었다. 동로가 세상을 뜬 지 3년이 되는 해(1074)였다. 그로부터 16년 뒤에 전당(錢塘)에서 다시 동로의 아들 해(偕)를 만났을 때 이 시를 지어 그에게 주었다. 원우(元祐) 5년(1090) 5월 25일, 동파선생(東坡先生) 쓰다.
(熙宁元年八月十九日,有道人过沈东老饮酒,用石榴皮写句壁上,自称回山人。东老送之出门,至石桥上。先渡桥数十步,不知其所往。或曰:“此吕先生洞宾也。”(熙宁)七年,仆过晋陵,见东老之子偕,道其事。时东老既没三年矣,为和此诗。其后十六年,复与偕相遇钱塘,更为书之。(沈)偕字君与,有文行,世其家云。元祐五年五月二十五日,东坡先生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