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장연우 한송정곡(張延祐 寒松亭曲)

청 무 성 2024. 9. 26. 09:47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청렴 결백한 관리를 줄여서 청백리(淸白吏)라고 한다. 공직자나 단체를 대표하는 자는 절대로 부정부패와 권력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관리로서 청백리의 호칭을 받는 것은 대단히 큰 영예로 간주되었으며, 오죽하면 1대가 청백리 되는 게 3대가 영의정 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전해져 올 정도였다.

의정부(議政府) 당상관(堂上官) 및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수장(首將) 등 2품 이상의 관리들이 해당 인물을 천거한 뒤 임금의 결재를 통해 의정부에서 결정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는 이러한 공직자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장관에 추천되었다고 하나 청문회 때 지난날의 과오를 낱낱이 들추어내기 때문에 이를 기피하거나 물망에 오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도 40년이 넘어 재건축이 시공사를 선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사리(私利)에 눈먼 조합장이 일부 조합 이사진과 추종자 몇몇을 동원하여 각종 편법으로 특정업체를 시공사로 선정함에 따라 조합원 간 반목과 분열로 재건축이 험로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곧 비리가 검찰 수사를 통하여 밝혀지면 조합장은 곧 영어(囹圄)의 몸이 될 것임이 명백하다.

불법에 따른 소요비용 등은 변상조치가 뒤따를 것이며 하루아침에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생허작(人生虛作)의 말로와 함께 그가 저질렀던 자업(自業)에 대한 혹독한 자득(自得)의 시간이 목전에서 기다릴 것이다. 재건축은 윤리, 도덕성을 갖춘 조합장이 봉사자의 마음으로 모든 사안들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처리해 나간다면 성공적인 사업이 될 것이다.

 

오래 전에 소개한 바 있는 어느 공직자의 좌우명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면

 

春水鮮魚戱海游天(춘수선어희해유천) 봄날 선어가 바다를 하늘 삼아 유유자적 노니는데

香餌不貪何畏釣者(향이불탐하외조자) 향기 나는 미끼를 탐하지 않는데 어찌 낚시꾼을 두려워하랴.

향기 나는 미끼는 맛있게 잘 차려진 쥐약과 같다.

 

길고 길었던 여름을 뒤로하고 며칠 사이에 완연한 가을을 되찾게 되었다. 한낮의 햇볕은 따갑지만 맑은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장연우(張延祐)의 한송정곡(寒松亭曲)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는 고려가요(高麗歌謠)에 ‘한송정곡’이 있으나 제목만 전하고 노래의 내용은 미상인데, 이 노래가 거문고 밑바닥에 적혀 중국 강남땅까지 흘러간 것을 고려 광종 때(949~975) 장진공(張晉公)이 그곳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노래의 뜻을 묻기에 위와 같이 풀어지었다고 ‘高麗史(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한송정곡’은 이두(吏讀)로 기록한 노래이리라.

한송정곡(寒松亭曲)은 음미할수록 정갈하면서도 여운이 넘치는 멋진 시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한송정곡(寒松亭曲 : 강릉 경포대 한송정의 노래)

月白寒松夜(월백한송야) 달 밝은 한송정의 밤

波安鏡浦秋(파안경포추) 경포의 가을 물결 잔잔한데

哀鳴來又去(애명내우거) 슬피 울며 오가는 것은

有信一沙鷗(유신일사구) 믿을 수 있는 갈매기 하나.

 

장연우(張延祐. 미상 ~ 1015년)는 고려전기 중추사(中樞使 : 고려 시대 중추원(中樞院) 소속의 종 2품 관직),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 고려 시대 어사대의 정 3품 관직), 호부상서(戶部尙書 : 고려 시대 육부(六部)의 하나인 호부(戶部)의 장관급 관직. 품계는 정 3품) 등을 역임한 관리로 본관은 흥덕(興德)으로 객성(客省 : 고려 초기 외국의 빈객(賓客)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을 지낸 장유(張儒)의 아들이다.

1011년(현종 2) 거란이 침략하여 태묘(太廟: 종묘)와 궁궐을 불태우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하공진(河拱辰)이 붙잡혔다는 풍문을 듣고 모두 달아났으나, 채충순(蔡忠順)·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應仁) 등과 더불어 호종(扈從 : 임금의 행차 때에 어가(御駕) 주위에서 임금을 모시는 사람, 또는 그러한 행위) 한 공으로 중추사(中樞使)를 거친 뒤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었다.

1014년 일직(日直) 황보 유의(皇甫兪義)와 더불어 거란침입 이후 군액(軍額)의 증가로 백관(百官 : 모든 벼슬아치)의 녹봉이 부족해지므로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녹봉에 충당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상장군 최질(崔質)과 김훈(金訓) 등이 주동이 되어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 그를 유배시켰다. 1015년에 호부상서로 임명되었고, 그 해에 죽었다. 별세한 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