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求古深論

유우석 누실명(劉禹錫 陋室銘)

청 무 성 2019. 2. 18. 17:02

유우석(劉禹錫, 772 ~ 842)은 중당(中唐)의 시인으로 자는 몽득(夢得)이고, 호는 여산인(廬山人)이다. 낙양(洛陽, 지금의 허난(河南)성 뤄양시) 출신이다.
19세에 장안(長安, 지금의 산시(陜西)성 시안(西安))으로 유학했고, 덕종 정원(貞元) 9년인 793년에 진사가 되었다. 이후 박학굉사과에 급제하여 정원 11년인 795년에 태자교서(太子校書)가 되었다.
정원 16년인 800년에 회남(淮南,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화이난시) 절도사 두우의 막료가 되었는데,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정원 19년인 803년에 감찰어사(監察御史)되었다.
유종원(柳宗元), 진간(陳諫), 한엽, 왕숙문과 교분을 맺었다. 이후 유종원, 왕숙문 등과 함께 정치 개혁을 기도했지만 순종 영정(永貞) 원년인 805년 왕숙문이 실각하자 낭주사마로 좌천되었다.
10후인 헌종 원화(元和) 9년에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었는데 그때 지은 시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 다시 연주자사로 전직되었다. 이때 원래 유우석은 파주(播州, 지금의 구이저우(貴州)성 보저우시) 자사로 좌천될 예정이었지만 어사중승(御使中丞) 배도가 헌종에게 유우석에게는 여든이 된 노모가 있으니 멀리 보내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여 연주자사가 되었다.
이후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했고 문종 개성(開成) 원년인 836년에 배도의 추천으로 태자(太子) 빈객(賓客, 교육담당)과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를 지내 유빈객(劉賓客)’ 혹은 유상서(劉尙書)’라고 불렸다.
만년에는 낙양으로 돌아와 여유롭게 생활하다가 태자빈객을 최후로 생애를 마쳤다. 하남(河南) 정주(鄭州) 형양(滎陽, 지금의 허난성 정저우시 싱양시)에 묻혔다. 사후에 호부(戶部)상서로 추증되었다.
시인으로도 유명하여 위응물(韋應物), 백거이(白居易)와 더불어 삼걸(三傑)’로 불렸다. 만년에 백거이와 시를 교류하며 지내 유백(劉白)’으로 불리기도 했다.
유우석은 민간의 생동감 있는 감각을 시로 승화시켰다. 시풍이 참신하고 민가의 특성이 농후했다. 특히 호방한 시의(詩意) 때문에 시호(詩豪)’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또한 많은 책을 소장하여 천 일을 술에 취해 있고, 서른 수레의 책을 보관하고 있다.”라는 평을 들었다. 저서로 유몽득문집(柳夢得文集) 30권과 외집(外集) 10, 유빈객집(劉賓客集)이 있다.
농민의 생활 감정을 노래한 죽지사(竹枝詞)를 펴냈고, 유지사(柳枝詞)와 삽전가(揷田歌) 등도 지었다.

개하고자 하는 유우석의 자계 명인 누실명(陋室銘)은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으로 군자가 거처함에 있어 어떠한 화려한 외식이나 요식이 없이 오직 느추함 속에 청빈함과 향기로움, 덕이 숨 쉬는 곳에서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했던 작자의 면모가 잘 반영된 명문장으로, 물질문명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잔잔한 교훈을 안겨준다..

누실명(陋室銘 : 느추한집의 自戒銘)    - 劉禹錫(유우석)

山不在高 有仙則名(산부재고 유선칙명) 산은 높아서가 아니라 신선이 살면 이름을 얻는다

水不在深 有龍則靈(수부재심 유룡칙령) 물은 깊어서가 아니라 용이 살면 영험 한 것이다.

斯是陋室 惟吾德馨(사시누실 유오덕형) 이 누추한 방에는 오직 나의 향기로운 덕이 있을 뿐이다

苔痕上階綠 草色入簾靑(태흔상계록 초색입염청) 이끼는 섬돌을 따라 푸르고 풀빛은 주렴에 푸르게 비친다.

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담소유홍유 왕래무백정) 훌륭한 선비들과 담소를 나누고, 비천한 자들은 왕래하지 않으니,

可以調素琴 閱金經(가이조소금 열금경) 거문고 연주하고 금경 읽기를 즐긴다.

無絲竹之亂耳(무사죽지란이) 음악 소리 귀를 어지럽히지 않고,

無案牘之勞形(무안독지로형) 관청의 문서를 읽는 노고도 없으니

南陽諸葛廬 西蜀子雲亭(남양제갈려 서촉자운정) 남양은 諸葛亮(제갈량)의 초가집이요, 西蜀(서촉)은양자운(揚雄)의 정자와 같도다

孔子云 何陋之有(공자운 하누지유) 공자도 말하였지, '군자가 살고 있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라고


누실(陋室)'누추한 집'이라는 뜻이며, '()'은 대개 쇠북이나 솥, 비석 따위에 스스로 경계하거나 남의 공덕을 길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지은 문장의 한 종류를 말한다. 작자는 누추한 집에 살지만 덕()의 향기로 가득 채우겠노라며 자신이 놓인 초라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드러내면서, 일세를 풍미한 촉나라의 제갈량(諸葛亮)과 한나라의 양웅(揚雄)이 살던 초라한 집을 언급하여 자부심을 높이고 있다. 나아가 마지막 구절에서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을 그와 같은 군자(君子)로 끌어올리고 있다. 논어(論語)의 자한(子罕) 편에 공자가 구이(九夷) 땅에 거하려고 하였을 때 누군가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자 공자는 "군자가 사는 곳에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