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 선시 몇 수(西山大師 禪詩 몇 首)
人境俱奪(인경구탈 : 주관과 객관을 모두 버림)
이화천만편(梨花千萬片) 배꽃 잎 천만 조각
비입청허원(飛入淸虛院) 청허원에 날아드네
목적과전산(牧笛過前山) 목동의 피리소리 앞산을 지나건만
인우구불견(人牛俱不見) 사람도 소도 보이지 않네..
화우(花雨 : 꽃비)

백운전후령(白雲前後嶺) 흰구름 앞 뒤 고갯마루에 걸쳐 있고
명월동서계(明月東西溪) 밝은 달은 동서 쪽 계곡을 비추네
승좌낙화우(僧坐落花雨) 스님 앉은 곳 꽃 비 내리는데
객면산조제(客眠山鳥啼) 객은 잠들고 산새 소리만...
삼몽사(三夢詞 : 세 꿈 이야기)

주인몽설객(主人夢說客) 주인은 나그네에게 꿈 이야기하고
객몽설주인(客夢說主人) 나그네도 주인에게 꿈 이야기하네
금설이몽객(今說二夢客) 지금 꿈 이야기하는 두 나그네
역시몽중인(亦是夢中人) 또한 꿈속에 사람인 것을...
소선운대우(蘇仙韻待友 : 벗을 기다리며)

야심군불래(夜深君不來) 깊은 밤 그대는 오지 않고
조숙천산정(鳥宿千山靜) 새는 잠들고 온산은 고요한데
송월조화림(松月照花林) 달은 소나무 사이로 화림을 비추니
만신홍록영(滿身紅綠影) 온몸은 붉고 푸름으로 얼룩져 있네
*불일암(佛日庵)

심원화홍우(深院花紅雨) 깊은 산 선원에는 붉은 꽃비 흩날리고
장림죽취연(長林竹翠烟) 긴 대나무 숲에는 푸른 안개 피어오르네
백운응령숙(白雲凝嶺宿) 흰 구름은 산봉우리에 머물러 자고
청학반승면(靑鶴伴僧眠) 스님은 청학을 친구 삼아 졸고 있네
*지리산 쌍계사 불일암(佛日庵)은 청학봉 중턱에 있는 진각(眞覺1178~1234)국사가 창건한 작은 암자다. 쌍계사 주지로 있던 서산대사(淸虛休靜, 白華道人) 스님이 어느 봄날에 불일암을 찾아 그때의 정경을 시로 남겼다.
게송(偈頌)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 이는 것이요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사란 한 조각 뜬 구름 없어지는 것이다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뜬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생사의 오고 감 또한 이와 같도다.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조선 후기 해남 대흥사에서 활동한 승려로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별호는 서산대사·백화도인(白華道人)·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등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 승첩을 돌려 승군을 조직하고 왜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서산대사는 1520년(중종 20)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화엄경(華嚴經)』·『원각경(圓覺經)』·『능엄경(楞嚴經)』·『유마경(維摩經)』·『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 등을 읽으며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그 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각지를 떠돌며 수행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며 물러나 금강산·두륜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다니며 수행하였으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감록(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가 무죄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서산대사를 불렀다. 이에 서산대사는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었고,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서산대사는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이후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서산대사는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서산대사의 선교관(禪敎觀)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고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닦으면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성도문(聖道門)에 입각하고 있다.
서산대사의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雲水壇)』·『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 등이 있다.
대흥사, 보현사(普賢寺), 안심사(安心寺), 유점사(楡岾寺)에 서산대사 부도가 건립되어 있다.
선조는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고, 해남 대흥사와 강원도 금강군 백화암에 서산대사의 비가 건립되었다. 서산대사의 호국충혼을 추모하는 국가의 제사인 서산대제를 대흥사 표충사(表忠祠), 보현사 수충사(酬忠祠)에서 봄가을에 봉행하였다.